등록 : 2019.12.01 18:32
수정 : 2019.12.02 09:38
야마구치 지로 ㅣ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일본 미디어에서도 홍콩 상황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지난 11월24일 치른 구의회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이 압승했다.
이를 계기로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가 확인되고 홍콩 시민의 자유가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홍콩 시민을 움직였던 것은 중국 공산당이 일국양제를 파괴하고 독재로 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었다. 자유로운 사회의 붕괴에 직면해 몸을 던져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시민들에게도 결코 행복한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유를 지키려고 일어선 시민들의 모습에 감동한다.
시민사회의 강함이라는 점에서 보면 한국도 자랑스러울 만하다. 민주화 기억이 아직 남아 있고 대통령 부패와 강권에 대항해 시민이 거리에 나와 항의함으로써 정치를 바꾼 경험이 있다. 정치학에서는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싶어 할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경구가 있다. 이 경구는 서구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실현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자유도 민주주의도 당연한 것이 돼 사람들을 고무하는 이념은 없어졌다. 태평양전쟁 뒤 일본에서 시민이 거리에 나서서 정치를 바꾼 사례는 1960년 이른바 ‘안보투쟁’이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일-미 안보조약 개정을 제안해 중의원에서 조약 개정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시민이 분노하고,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조약은 여당이 찬성해 통과됐지만, 기시는 정치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기시는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각료 중 한 사람이었으며, 패전 뒤에는 에이(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던 경력이 있다. 그 이후 정계에 복귀해 총리 자리까지 올라가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는 패전 뒤 15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라, 많은 시민이 전쟁의 비참함과 전후의 해방을 기억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이전 일본의 지도자였던 기시의 개헌 노선에 시민들은 강한 위기감을 느꼈고, 시위에 참여했다. 60년 안보투쟁 뒤에도 자민당 정권은 계속됐지만, 이후 자민당은 당시의 교훈을 정확히 이해하고, 헌법 개정을 사실상 단념하고 경제 발전과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으로써 국민을 통합했다.
내년이면 안보투쟁 60년이 된다. 기시의 손자 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의 숙원을 완수해야 한다며, 헌법 개정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이번 11월에 일본 근대 역사상 최장의 내각 지속 기록을 수립했다(일본은 임기 제한이 있는 대통령제가 아니기 때문에,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면 정권을 지속할 수 있다). 그사이 특정비밀보호법과 공모죄 등 헌법상 논란이 있는 법률이 통과되고, 권력집중에 따른 부패와 오만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은 위기감을 갖고 있지 않다. 아베 정권 아래에서 중앙정치 선거 투표율은 50% 전후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는 24년 만에 투표율이 50% 아래로 떨어졌다. 유권자 반수 정도가 기권했다는 것은, 절반 정도의 국민이 아베 정권에 백지위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베 총리는 선거에 강하다는 말을 듣고 있지만, 무관심이야말로 아베 정권의 장기 지속을 불러왔다. 아베 정권이 중국 시진핑 정권과 같은 의미의 독재 체제를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사회의 위기는 완만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인구 감소는 계속되고, 사회보장과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없어지고 있다. 20년, 30년 뒤의 일본인은 원전 사고 등의 어두운 유산에 눌려 찌부러질지도 모른다.
지금, 일본에서는 아베 총리가 주최한 ‘벚꽃을 보는 모임’에 각계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격려한다는 표면적인 설명과 다르게, 총리 지지자를 모아 세금으로 접대를 해왔다는 의혹이 주목받고 있다.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한심한 스캔들이다. 이를 계기로 정치의 공평함과 공정함을 되찾는 데 관심이 높아질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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