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3 16:07
수정 : 2019.12.24 02:45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스웨덴 최대 기업집단 발렌베리그룹의 총수 격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스톡홀름엔실다은행(SEB) 회장을 만나 사업 논의를 벌인 건 하필 18일이었다. 노조 파괴 공작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전·현직 삼성 임원들이 무더기 실형 선고를 받은 지 하루 뒤로, 삼성이 사과 뜻을 담은 입장문을 발표한 날이다. 발렌베리그룹은 삼성이 한때 본보기로 삼아 연구했던 기업이라는 점에서 애석한 일이다.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국민으로부터 절대적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음은 구문이다. 이번에 스웨덴 총리와 함께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마르쿠스 발렌베리는 63살의 동갑내기 사촌 야코브 발렌베리 ‘인베스터AB’ 회장과 함께 발렌베리그룹을 이끄는 투톱이다.
바깥에 알려진 삼성과 발렌베리 사이의 인연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에스디에스(SDS)·에버랜드 지분을 이 부회장에게 편법으로 넘긴 것을 둘러싸고 논란이 들끓던 시절이었다. 그해 7월 이건희 삼성 회장은 이재용 당시 상무,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함께 발렌베리 가문과 그룹 지주회사(인베스터AB)를 방문했다. 그 뒤 삼성그룹의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이 스웨덴에 파견돼 1년가량 머물며 스웨덴의 기업 문화와 지배구조를 집중 연구했다고 한다. 2012년에는 이재용 부회장이 방한한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 일행을 리움미술관으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경영권을 세습하면서도 스웨덴 사회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비결을 배우고 싶어 했음 직하다.
스웨덴 경제에서 차지하는 발렌베리의 비중은 한국의 삼성을 넘어설 정도로 막대하다. 인베스터AB를 통해 통신(에릭슨), 가전(일렉트로룩스), 발전(ABB), 건설장비(스카니아), 제약(아스트라제네카) 같은 굵직굵직한 분야를 석권하고 있다.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 상장주식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한다 할 정도다. 여기에 5대째 가족경영의 맥을 잇고 있다.
경제력 집중도나 세습의 길이에서 삼성보다 더한데도 발렌베리가 스웨덴 국민의 애정의 대상으로 명성을 누리는 비결은 짐작하는 대로다. 중소기업 영역을 넘보지 않고, 장기투자에 치중하며 산학 협력과 사회사업에 앞장서는 사회적 책임의 자세를 견지한 덕이다. 기업의 확장 속에서도 ‘차등 의결권’에 힘입어 지배권을 유지한다고 하나 창업자 가문의 지분은 거의 다 공익재단으로 넘어가 있다.
가족경영 체제의 발렌베리그룹이 후계자를 뽑을 때 철저하게 능력 위주라는 사실도 많이 알려져 있다. 예컨대 자력으로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스스로 글로벌 기업에 취업해 소정의 이력을 쌓도록 하는 식이다. 노동자 대표를 이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알 수 있듯 노조를 경영의 주요 파트너로 삼는 점도 우리 눈에는 이채롭다.
발렌베리 소속 각 기업의 이익은 인베스터를 통해 공익재단으로 들어와 대학 교육이나 연구개발비로 흘러간다고 한다. 가문 사람들은 재단의 돈에 손을 댈 수 없으며, 여러 공익재단과 계열 기업에 재직하면서 급료를 받을 뿐이다. 기업과 달리 가문 구성원들의 개인 재산은 미미한 게 이 때문이다. 기업 소유권을 사회에 돌리는 대신 경영권 행사를 인정받은 스웨덴식 타협의 산물인 셈이다.
발렌베리 가문에도 시련은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이른바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좌파운동이 유럽을 휩쓸 때 이 가문에 맹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경제력 집중과 가족 소유 시스템 탓이었다. 발렌베리는 여기에 맞부딪치는 대신 경영 본분에 조용히 집중하면서 사회적 기여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대처했다고 전한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가문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오늘날의 명성 이면에는 이런 인고의 세월이 쌓여 있었다.
삼성이 또다시 시련의 시간을 맞고 있다. 노조 파괴 사건에 앞서 이 부회장의 뇌물 사건 대법원 확정판결,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증거인멸 유죄(1심) 선고까지 받아 사회적 질타를 맞고 있다. 모두 경영권 세습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무거운 사안이다. 빛나는 기업 실적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총수 가문에 얽힌 탈·위법의 그림자다. 삼성이 한국 사회에선 애증의 대상인 배경이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2014년 11월 공저 <위기의 삼성과 한국 사회의 선택> 출간 직후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삼성에 요구한 세 가지 변화로 삼성에스디에스·에버랜드 지분 취득 과정의 잘못 인정, 경영권 독점 세습 중단, ‘무노조 경영 방침’ 폐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이뤄지고 이에 힘입어 이 부회장은 삼성의 경영권을 확고히 장악하는 중대한 변화가 이뤄졌지만 세 가지 요청 중 어느 것 하나 받아들여진 게 없다. 삼성의 이번 입장문에 무노조 경영에 대한 사과의 뜻이 모호하게 담겼을 뿐이다. 삼성에 대한 애증이 애정으로 바뀌기까지 거쳐야 할 시간과 절차가 아직 많이 남은 듯하다.
김영배 논설위원
kimyb@hani.co.kr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