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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5 17:24 수정 : 2019.12.26 02:35

나는 2002년에 방송작가가 되어서, 이 일을 한 지 올해로 18년차를 맞았다. 지난달 처음으로 산업재해 신청을 내고 기다리고 있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방송작가 신분으로 산재 신청을 했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본데다 그것이 받아들여졌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전 일하다가 하혈을 해도, 그러다 일을 쉬어도 아무것도 해볼 도리가 없던 것에 견주면 많이 나아진 셈이다. 최소한 산재 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잡은 거니까.

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해서 산재보험 가입을 하려면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계약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계약서를 쓰지 않은 나는 내내 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가을, 방송작가로서가 아닌 다른 작업을 하면서 계약서를 쓸 기회가 생겼고 이것으로 산재보험 가입을 했다. 그것이 10월의 일이다.

하지만 몰랐다. 산재 신청을 하려면 질병이나 사고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하다못해 취재를 가다가 사고가 나는 게 아닌 이상 사고로 판정받기는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질병에 대한 부분도 산재보험 가입 이후에 발생한 것에 대해 신청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지난 봄 개편을 하면서 보름 동안 100쪽이 넘는 프리뷰(영상을 문서로 정리하는 작업)를 하고 100장이 넘는 원고를 써야 했다. 그 뒤부터 왼팔에 힘이 빠져서 물건을 드는 것도 버거웠고 문서 작업을 하면 오탈자가 부지기수로 발생했다. 최근 들어 힘 빠지던 왼팔에 통증까지 겹쳐 정형외과에서 염좌 등의 진단을 받았지만 질병 발생이 산재보험 가입 이전이라 힘들 거라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담당 공단에서도 수차례 불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산재보험 가입 전에도, 또 지금도 여전히 방송작가라는 업을 하면서 발생하는 이 질병으로, 또 이 직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꾸준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질병이라면 분명 산업재해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문제는 산재에 대한 증명이었다. 공단에서는 방송작가로 일을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를 요구했다. 하루에 몇시간을 일하고 어떤 강도로 일하는지 등을 자료로 남기라는 거다.

하지만 단순히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방송작가의 업무 강도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때로는 일주일 중 잠드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할 때도 있고 또 오가며 길 위에서 섭외 전화를 해야 하는 경우도 수두룩한 것이 방송작가의 업무다. 그것들을 수치로 계산을 하라니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해당 공단 담당자에게 방송작가의 업무를 이해시키는 것도 나로서는 벅찬 과제였다. 수많은 직업군이 있다 보니 그에 대한 모든 직업적 정보를 알지는 못할 수 있다지만, 그럼에도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직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재 신청이 쉬워졌다는 티브이 홍보는 있지만 처음 신청하는 서류만 간단해졌을 뿐 그 내용은 전혀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산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나름의 해결책으로, 원고와 프리뷰 노트 등 200쪽이 넘는 인쇄물을 보내고 의사 소견서와 시티(CT·컴퓨터단층촬영) 영상 등을 보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물론 산재 판정을 받는다고 해도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정형외과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하고 있지만 일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크게 진전은 없는 상태인 나는 아마도 이것이 계속된다면 방송작가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방송작가도 업무로 인한 재해 발생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끝까지 해볼 생각이다.

이미경(가명) ㅣ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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