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2.26 18:06 수정 : 2019.12.27 02:06

전치형 ㅣ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얼마 전 소셜미디어에서 ‘깊은 바다’라는 웹사이트(neal.fun/deep-sea)가 관심을 끌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 올리면 마치 잠수함을 탄 것처럼 바다 밑으로 내려가면서 거기 사는 해양생물들을 보여준다. 700미터쯤에는 6600만년 전에 멸종된 줄 알았다가 1938년에 새로 발견된 실러캔스가 있었고, 3천미터에는 포유류 중 가장 깊이 헤엄친다는 민부리고래가 있었다. 1만미터가 넘는 바닥까지 내려가려면 아주 오랫동안 손가락을 움직여야 했다. 바다는 정말 깊었다.

‘깊은 바다’에서 느낀 것은 ‘자연의 신비’라기보다는 ‘과학의 힘’이었다. 저 깊고 어두운 곳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을까. 1600미터쯤에 등장하는 설인게는 2005년에 미국 우즈홀해양연구소가 운용하는 유인잠수정 ‘앨빈’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 과학자들이 발견했다. 2900미터쯤에 등장하는 뱀파이어 오징어가 얕은 바다에서 깊은 바다로 눈처럼 내려오는 유기물을 먹고 산다는 사실은 2012년 미국 몬터레이만 아쿠아리움 소속 과학자들이 원격조종 잠수정을 활용해서 밝혀냈다. 심해 과학자들은 새로운 생명체를 찾는 일과 그것을 위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깊은 바다’에 등장하는 민부리고래보다 더 깊은 곳, 약 3400미터 지점에 스텔라데이지호의 선체가 놓여 있다. 브라질에서 철광석을 싣고 중국으로 가다가 2017년 3월31일 남대서양에서 침몰한 스텔라데이지호에는 선원 24명이 타고 있었고, 이 중 두명만 구조되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63빌딩보다 더 큰 배가 왜 갑자기 침몰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외교부 의뢰를 받은 오션인피니티사가 지난 2월 선체를 발견하고 항해기록장치를 수거했지만, 사고 원인 규명에 유용한 데이터를 추출하지는 못했다. 배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마셜제도 쪽의 조사보고서가 나왔지만, 가족들은 선체를 직접 조사해서 사고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3400미터 해저면에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있는 배에서 침몰 원인을 밝혀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그 깊고 어두운 바다에서 선체를 정밀하게 촬영하고 분석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20년 전부터 그런 조사가 가능했다. 1997년 우즈홀해양연구소는 4천미터에 가라앉은 화물선 더비셔호의 선체를 탐사해달라는 영국 정부의 요청을 받았다. 1980년에 침몰한 더비셔호는 1994년에야 발견됐고, 영국 정부는 당시 최고의 심해 탐사 기술을 보유한 우즈홀해양연구소에 더비셔호 침몰 원인 규명을 위한 정밀 조사를 의뢰했다. 더비셔호의 침몰을 둘러싼 모든 의혹을 해소하겠다는 영국 정부의 의지와 미국 과학연구기관의 역량이 결합됐다.

더비셔호는 가로세로 1킬로미터가 넘는 구역에 2천여 조각으로 흩어져 있었다. 우즈홀해양연구소 팀은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선체 조각을 모두 확인해서 지도를 만들었다. 해양 생물과 지질을 찍던 카메라가 4천미터 바닷속 부서진 선체 위를 돌아다니며 사진 13만장을 찍었다. 사고 원인 규명에 단서가 될 만한 부분은 가까이 다가가 정밀 촬영했다. 영국 정부가 발간한 더비셔호 수색 보고서에 담긴 사진들은 선체 절단면의 질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고조사팀은 모두 13개의 침몰 시나리오를 하나하나 검증해서 가장 유력한 침몰 원인을 밝혀냈다. 축적된 과학의 힘이 남김없이 발휘된 사례였다.

더비셔호 수색 마지막날 해가 질 무렵, 조사단은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화환을 바다로 던졌다. 더비셔호 보고서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바로 그 순간, 배에 타고 있던 우리 모두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거기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또 그들은 이렇게 얻은 지식이 앞으로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는 이들을 더 안전하게 만들 것”을 바라면서 보고서를 더비셔호 선원들에게 헌정했다.

더비셔호 사고에서 과학은 깊은 바다를 비추는 동시에 가족을 잃은 이들의 고통을 비추었다. 더비셔호와 마찬가지로 스텔라데이지호는 우리에게 기본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심해 로봇은 왜 만들고, 과학은 왜 하고, 국가는 왜 있는가를 묻는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이후 1천일이 지난 지금, 한국 정부는 과학의 힘으로 바닷속 어디까지 밝힐 의지가 있는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