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31 18:02
수정 : 2020.01.01 02:36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인 2017년 5월 대통령이 직접 인천공항에 찾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눈물짓게 했던 공약 “비정규직 제로 시대”의 꿈을 실제로 이룬 사업장이 드물게 있다. 공통점은 비정규직의 문제를 정규직이 중심이 돼 풀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한 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쉽게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사람들이 정규직이 돼서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일에 왜 정규직이 낸 조합비를 사용하느냐?”고 항의하며 탈퇴한 정규직 조합원도 적지 않았다. 노동조합 집행부는 그런 조직력의 감소를 각오하더라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고 매해 단체교섭 때마다 최우선 순위에 두고 요구해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노조에 가입해 오랫동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에 앞장서왔다. 용역 경비회사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여성 조합원이 손목 골절상을 입을 정도로 격렬한 투쟁을 임금·단체교섭 시기 때마다 겪어야 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투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활동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노동조합의 여러 해 가열한 투쟁이 없었다면 “비정규직 100% 직접고용 정규직화”라는 꿈을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조합원’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당연히 정규직 전환 대상에 포함됐다. 그 사람들은 노동조합(원)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조합비도 낸 적 없고, 노조가 회사와 맞서는 정규직화 투쟁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거나, 되레 회사의 사주를 받아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면서도 어부지리로 정규직이 됐다면 일말의 미안함과 함께 자신과 동료를 돌아보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방어기제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정규직이었다가 정규직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이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곁을 지나는데, 한껏 거만한 말투로 내뱉는 말이 들렸다. “문재인 정부니까 된 거 아냐?”
그 사람은 뭔가 크게 잘못 알고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대법원에서 명백하게 “직접고용 해야 한다”고 판결했는데도 “직원들이 반대해서”라는 가당찮은 이유로 그 판결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사건을 정부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오랜 기간 축적된 노동조합 활동의 성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뤄낸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위와 같은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혜택’을 받는 당사자들에게조차 외면당한 채, 사회 지배세력과 맞서 싸우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한걸음씩 꾸준히 이루어가는 우리 사회 거의 유일한 조직이 그나마 민주노총이다.
그 민주노총의 조합원 수가 한국노총보다 많아져 명실상부한 제1노총이 됐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동안 민주노총 조합원 통계에는 이른바 ‘법외 노조’인 공무원노조와 전교조가 포함되지 않았는데 한국노총과의 조합원 수 차이보다 이 두 노조 조합원 수가 훨씬 많았으므로 노동 현장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노총이 제1노총이라는 정서가 자리 잡혀 있었다. 이번 정부 통계에 여전히 포함되지 않은 전교조 조합원 수가 더해지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조합원 수 차이는 훨씬 더 크게 벌어질 것이다.
경제신문이나 보수언론의 논조는 우려 일색이다. “기업 쪼그라든 마당에 민노총만 급성장, 이게 정상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쓴 매체도 있었는데, 오히려 그런 제목의 사설을 쓰는 언론이 정상인지 되묻고 싶다. 제1노총이 된 민주노총이 이제 책임의식을 갖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그렇게 되려면 정부의 정책 방향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와 주 52시간 최대 노동시간제 유예 등 노동자들이 양보할 것들을 미리 정해놓고 설득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현재 노·사·정협의체의 내용이 바뀌지 않는 한 민주노총에 참여하라고 요구할 명분은 없다. 오죽하면 선거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 참여 공약을 주장한 집행부가 들어섰는데도 막상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여 안건이 부결됐을까? 제1노총인 민주노총이 경사노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정부와 기업이 좀 더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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