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31 18:02
수정 : 2020.01.01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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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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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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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박아무개(당시 47살)씨는 서울 종로 탑골공원을 걷다 무임승차가 가능한 나이의 주민등록증 하나를 발견했다. 박씨는 이를 챙겨둔 뒤 이듬해 3월 지하철 부정 승차에 사용했다. 서울 종로 동대문역에서 이 주민증으로 승차권 발매기에서 지하철 표를 산 뒤 서울역까지 이동한 것이다. 박씨가 내야 할 돈은 1850원(일반요금+보증금)이었지만 사실상 보증금 500원밖에 내지 않았다. 2018년 7월 박씨는 점유이탈물 횡령과 편의시설 부정 이용 혐의로 서울중앙지법에서 벌금 5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50만원은 박씨에게 한달 생활비가 넘는 큰돈이었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직업도 없었다. 거리에서 노숙을 하다 지난해 6월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돼 매달 약 70만원을 받게 됐지만 새로 구한 쪽방의 월세 24만원을 빼면 손에 쥐는 돈은 46만원뿐이었다. 건강보험료가 연체돼 통장도 압류된 상황. 우울증, 불안증으로 약을 먹고 있어 벌금형 대신 노역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박씨는 벌금 낼 돈이 없어 감옥행을 택하게 되는 이들을 돕는 시민단체 장발장은행 덕분에 가까스로 교도소 생활을 면했다.
벌금형도 집행유예가 가능해진 지 2년이 흘렀다. 2018년 1월 시행된 이 제도로 법원은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게 됐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00만원 이하 벌금을 선고받은 이들은 전체 벌금형의 97%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도입된 지 수년이 되도록 이용률은 저조한 편이다. 지난해 벌금형 중 집행유예가 선고된 건은 1.3%뿐이고, 지난해 1~11월 월별로 따져도 월 2~3%대에 머물렀다. 한 판사는 “요즘 여론은 ‘엄벌주의’를 원한다. 양형에 대해 법원이 세간의 비판을 많이 받다 보니, 양형을 고려해 벌금형을 선택했는데 거기서 집행유예로 형을 더 줄여주기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벌금형은 형사처벌로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 불이익을 주고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집행을 유예하는 데 신중해야 하지만 개중에는 이런 사례들이 있다.
2016년 6월 경남 김해시에 있는 ㄱ마트에서 김아무개(당시 28살)씨가 8천원짜리 생리대 한 팩을 가방에 몰래 집어 넣었다. 다음달 같은 마트에서 1만2천원어치 비빔참치 3개와 1만2천원어치의 임실 치즈 4개도 훔쳤다. 그는 그렇게 이듬해 5월까지 네차례에 걸쳐 절도를 저질렀다. 훔친 물건들은 생리대, 김밥, 치즈, 젤리류들로 모두 합해 7만원이 넘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 김씨의 절도 이유가 밝혀졌다. “생리가 시작됐는데 생리대가 없었다.” “과거 산소공급 치료 과정에서 치아가 전부 녹아 없어졌다. 마이쮸와 치즈를 보니 먹고 싶어 가지고 나왔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앓은 뇌수막염으로 1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가 겨우 회복했지만 지적장애(초등학교 1~2학년의 지적 수준)를 얻었다. 부모는 별거했고, 그를 돌보던 어머니도 병을 앓았다. 지난해 4월 김씨 사건을 심리한 창원지법은 김씨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하면서 그 집행을 1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절도 액수와 피해자 의사, 범행 경위, 성장 환경, 치료 필요성을 종합해 판단한 결과다. 이 판결이 아니었다면 김씨는 교도소에 갔을지 모른다.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되물을 만한 일들이 여전히 뉴스를 장식한다. 경제적 빈곤을 견디지 못한 부모가 자녀와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고, 수십만원이 없어 감옥행을 택한다. 벌금형 제도의 재설계에 긴 시간이 걸린다 해도, 가용한 제도는 있다. 벌금형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뿐 아니라, 올해부터 사회봉사로 대체 가능한 벌금 상한액도 500만원으로 높아졌다. 사람들이 법원에 기대하는 것은 엄벌만이 아닐 것이다. 있는 제도를 돌아보자는 제언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깃든 재판을 기대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한솔 ㅣ 법조팀 기자
sol@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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