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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31 18:02 수정 : 2020.01.01 02:35

오늘은 새해 첫날이자 21세기 세번째 십년이 시작되는 날이다. 인권은 구체적인 사건과 매일 씨름하는 야전병원 같은 기능을 한다. 하지만 새해맞이 등산을 하듯 잠시나마 인권을 둘러싼 전체 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열심히 싸운다 해도 길을 잃고 헤맨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인권에도 조감도가 필요한 이유다.

2020년은 인권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몇개의 이정표가 있는 해이다. 역사를 잘 기억하고 그 의미를 잘 해석해야 제대로 된 행동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올 한해는 인권을 전략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기회는 한국전쟁, 광주민주화운동, 유엔, 그리고 글래스고라는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올해 우리는 인권의 관점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해석하며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6·25가 남긴 유산을 생각해보자. 파괴, 살육, 상실, 분리, 원한, 적대, 공포와 같은 구체적인 흔적은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전쟁이 끝나고 몇년 뒤에 태어났지만 팔, 다리를 잃고 쇠갈고리를 한 상이군인들이 동네에서 걸식하러 다니던 광경을 일상적으로 보며 자랐다. 총성은 멎었지만 어수선하고 폭력적인 전쟁의 그림자가 오랫동안 드리워져 있던 시대였다.

그런 식의 생생한 상흔은 이제 더 이상 찾기 어렵다. 그러나 전쟁의 유산은 우리의 가치관, 사회 구성원리, 정치문화, 대인관계에 속속들이 배어 있다. 매사를 대결과 승패로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관행이 대표적이다. 생존본능이 여전히 최우선이고, 그 어떤 원리원칙도 ‘먹고사는 문제’라고 주장되는 사안 앞에서는 무효가 되어버리는 경향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재산권 만능주의에 기대어 유난히 극성스러운 자본주의로 귀결된 것도 전쟁이 한몫을 했다고 봐야 한다. 그뿐인가, 전쟁의 학습효과로 세상 이치가 제로섬이라고 믿게 된 나라에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니 무한대의 경쟁과 배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다수 국민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전쟁이 국민의 원초적 심리를 비틀어놓았다면, 올해 40주년을 맞는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 폭력성의 적나라한 실상을 각인시켜주었다. 그것에 더해, 엄연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기록하는 일조차 불의한 권력이 개입될 때 어떻게 부인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났다.

5·18은 대규모 인권유린의 일차적 가해성과 사건 이후의 이차적 가해성이 정치적, 이념적으로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사적 기억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석판에 새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토론과 의미 부여를 통해 현재의 무대에 계속 호출해내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영원한 여정과도 같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추 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86세대를 키운 모태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사회의식을 조금이라도 품고 그 시대에 형성기를 보낸 사람 중 광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이들이 몇이나 될까. 명백하고 현존하는 불의에 대해 감연히 맞서야 함을 체득했던 86세대의 집단적 에토스는 지금까지 한국 정치문화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86세대에 가해지는 젊은 세대의 싸늘한 눈길은 역사적 맥락의 반전이자, 전통적 인권담론에 대한 도전장이기도 하다.

올해는 유엔 창설 7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전세계적으로 유엔에 관한 각종 논의와 대화가 일년 내내 계속될 예정이다. 하지만 정작 유엔은 잔칫상을 받을 만한 형편이 못 된다. 2차대전 이후 어쨌든 국제질서의 근간이 되어온 다자주의와 국제협력을 통한 문제해결이라는 원칙이 크게 손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가장 근본적인 성찰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인권담론이다. 인권은 좋든 싫든 서구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정치 이념이라는 배경에 의존했던 측면이 강했는데 그러한 병풍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도처에서 유사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이 인권의 바탕을 갉아먹고 있는데다, 중국식 발전 체제가 강력한 반서구적 대항이념으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도 기존의 인권에 유례없는 도전이 되고 있다.

유엔에서 오랫동안 구축해놓은 국제인권법 체제는 ‘법’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긴 하지만, ‘깊고 강한’ 구속력보다 ‘얕고 넓은’ 설득력으로써 인권을 실현하겠다는 취지로 발전해왔다. 이것은 인권담론을 일반적 차원에서 확산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적어도 사법적 의미에서의 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 인권을 말로는 중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권고밖에 못 내리는가”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국제형사재판소와 같이 ‘깊고 강한’ 접근이 늘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유엔을 통한 인권 실행이 일종의 병목 지점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올해 11월9일부터 19일 사이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기후협약 26차 당사국총회가 열린다. 이번 총회는 2015년 파리협약의 구체적 결정판이 될 것이다. 각국이 2030년 및 2050년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및 관련 계획을 올해 말까지 마감하여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글래스고에서 합의가 마무리되지 못하면 1.5도(섭씨,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폭 제한 목표) 억제는 고사하고 방어선으로서의 2조차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국제 교육계에서는 학교에서 기후변화를 독립 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인데 한국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은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결론적으로 전쟁, 광주, 유엔, 기후, 이 네가지 열쇳말을 통해 올 한해의 인권을 조망할 때에 유념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전쟁 방지와 국가폭력 청산과 다자주의적 국제협력은 앞으로도 여전히 인권에서 극히 중요한 토대로 인정될 것이다. 새로운 인권 이슈가 아무리 많이 제기된다고 해도 이런 기본을 잊어선 안 된다.

둘째,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한반도에서 평화와 공존과 통일을 논할 때 인권이 설 자리가 어디인지를 잊어선 안 된다. 국제적으로 한반도의 인권 논의가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일각에서 주장하듯 평화와 인권이 꼭 긴장관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남북화해와 통일을 원하는 사람일수록 ‘적절한’ 방식으로 인권을 계속 모색해야 한다.

셋째, 권력과 정치를 강조했던 인권담론이 현재엔 생활세계와 개인의 사적 영역, 성과 정체성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이 바뀐 상태다. 그러나 인권담론이 86세대 버전에서 2030세대 버전으로 교체됐다기보다는 확장됐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양자 간의 최적화를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수십년간 기후위기가 인권담론의 핵심적 맥락을 이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재앙적 기후위기가 초래할 인권침해의 범위, 규모, 특성을 예상하여 인권담론을 서둘러 재구성, 재정렬할 필요가 있다. 진작에 추진했어야 할 과업이다.

조효제 ㅣ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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