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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2 18:26 수정 : 2020.01.03 02:36

칼 폴라니는 1886년에 태어나 1964년에 죽었다. 그의 사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폴라니를 읽고 그의 통찰에서 크게 배운다. 죽은 폴라니가 살아 있는 우리들을 깨우친다.

폴라니는 결코 시장과 기술의 적은 아니었다. 그는 시장과 기술이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진보성을 받아들였다. 이 점에서 그는 동그라미를 작게 그리는 소공동체주의자나 제도적 착근의 사고를 갖지 못한 낭만주의자와는 달랐다. 그러나 이는 폴라니 사상의 한쪽 면에 불과하다. 폴라니는 복잡한 사회에서 자유와 연대를 어떻게 실현할지의 문제를 필생의 화두로 삼았다. 그는 이 화두를 잡고 쉼 없는 시장의 진화와 기술 변화가 던지는 양면성, 그 빛과 어둠에 대해 말했다. 맹목적으로 과속 질주하는 시장문명, 기술문명 및 산업문명의 위험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속도를 늦추고 사회적·제도적으로 착근시키지 못할 때, 허구로 가득 찬 ‘자기 조정 시장’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될 때 어떤 인간적, 사회적, 생태적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 우리 모두의 자유가 어떤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해 말했고 경고했다.

문제는 어떻게 시장과 기술이 모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장할 수 있도록, 더불어 좋은 삶을 위한 기회를 더 높이는 방향으로 착근시킬까 하는 것이다.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가 말한 성장 대 거주, 시장자유화 대 대항적 사회보호 간의 이중운동은 이처럼 통합적 인간으로서 삶의 욕구와 제도화라는 관점에서 시장문명 및 기술문명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다. 폴라니의 문제는 곧 구래부동한 우리의 문제이며 이중운동은 지금도 부단히 진행되고 있다.

<거대한 전환>은 폴라니가 남긴 불후의 대표 저작이다. 왜 불후의 명저인가? 폴라니는 사회가 시장의 부속물로 전락할 때, 고삐 풀린 시장이 사회의 실체적 공동자산, 즉 노동, 토지, 화폐금융, 생산조직을 허구적 상품으로 포섭할 때, 그리하여 대중이 굶주림과 탐욕에 허덕이며 불안에 내몰린 시장인간으로 추락할 때 허약한 민주주의는 위험에 빠지고 파시즘이 도래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고삐 풀린 시장은 물론, ‘반동적 보호주의’ 성격을 가진 파시즘을 이겨낼 수 있는 쇄신된 민주적 대안을 촉구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시장순응적 중도정치가 대표성의 위기에 빠지고 우익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있는 새로운 전환적 시대상황은 이 폴라니의 예리한 통찰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묻게 된다. 촛불혁명에 힘입어 출현해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를 달린다고 평가받는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과연 이 폴라니의 통찰과 경고에 책임 있게 답하고 있는가.

우리가 다시 불러내야 할 것은 1944년의 폴라니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가 탈상품화의 가능성에 대해 너무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 이후 낙관론을 거둔다. 그러면서 인류가 기술문명에서 한층 더 감당하기 어렵고, 통제 불가능하게 될 새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며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맹목적인 과학기술의 질주와 효율 지상주의가 초래하는 위태로움을 경고하면서 어떻게 이 위험을 통제하고 속도를 조절하고 모두의 자유와 좋은 삶을 위한 창조적 조정의 능력을 확장할 수 있을까, 기술물신·효율물신에서 벗어나 어떻게 우리의 사회적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자치력과 연대력을 드높일 사회적 혁신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거대한 전환> 이후 폴라니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자 메시지였다. 그가 남긴 방대한 유고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서양의 거듭남을 위하여’ ‘자유와 기술’ ‘아리스토텔레스의 풍요한 사회론’ ‘1960년에 바라본 거대한 전환’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후기 폴라니의 이러한 일관된 생각을 잘 보여준다.

폴라니는 ‘서양의 거듭남을 위하여’에서 서양의 문화란 과학, 기술, 경제조직이 고삐 풀린 채 서로를 강화하며 인간의 삶을 찍어내는 문화라며 히틀러와 스탈린의 만행을 겪은 이후 다시 인류가 미국 주도의 시장자본주의 논리, 그리고 핵전쟁의 위험 아래 놓이게 됐다고 지적한다. ‘자유와 기술’에서는 오늘의 복잡한 사회란 곧 우리 행동의 사회적 결과를 직접적으로 추적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이런 사회가 고도의 기술에 의해 지탱될 때 사회의 존재 자체가 불안정에 빠질 수 있다고 짚는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혁신성장의 성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집중된 권력에 예속될 수 있으며 파괴력을 가늠할 수 없는 불확실성 및 불안의 공포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풍요한 사회론’에서 폴라니는 좋은 삶을 낳는 공동체라는 의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회 개념을 불러낸다. 그러면서 이 개념을 효율성을 숭배하고 기술순응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산업사회 상황에 어떻게 가져와 인간다운 문화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을까라는 절실한 물음을 던진다. 그는 효율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구성원의 인간다운 욕구에 부응해 물자를 조달하고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산업생활에서 양심적 거부권의 인정, 거대 기업권력에 대한 길항력으로서 노동조합권의 전면적 인정, 노동자에게 선택적 자유시간을 보장할 것,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을 정부, 기업, 노조는 물론 교육, 국방, 의료, 예술 등으로 확장할 것 등을 과제로 제시한다.

‘1960년에 바라본 거대한 전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대전환과 미래 전망에 대한 글이지만 자신이 도달한 사상이론적 견지를 정리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고 있다. 이 글은 폴라니가 생애 마지막에 집중했던 잡지 <공존>의 발간 작업 관련 글을 제외하면 그의 최후의 사상이론의 도달점을 보여주는 유고로 꼽아야 할 듯하다. ‘거대한 전환의 수정 개요’와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유고는 좋은 삶의 개념과 사회적으로 착근된 경제의 개념을 통합적으로 제기한다. 이어 서구에서 도구적, 형식적 합리성의 지배와 고삐 풀린 시장사회가 어떤 참화를 낳았는지, 이중운동의 전개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요약한다. 2차대전 이후 거대한 전환을 설명하며 폴라니가 이미 인간, 자연, 화폐에 이어 과학적 지식의 허구적 상품화 및 과학과 정치의 결탁, 그 위험에 대해 논의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어떻게 과학기술 및 효율성에 대한 맹신과 위험에서 벗어날까. 그 고삐를 잡아 민주적, 사회생태적으로 착근시키는 사회적, 제도적 혁신을 이룰까. 이 혁신의 정치는 폴라니만이 아니라 화려한 ‘4차 산업혁명’ 담론과 고삐 풀린 ‘혁신성장’론에 휘둘리고 있는 오늘 우리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게’ 할 게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양을 잘 키우게’ 할까?

이병천 ㅣ 강원대 명예교수·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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