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7 19:01
수정 : 2020.01.08 02:07
<청년 75% “한국 떠나고 싶다”> 지난 12월16일치 <한겨레>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그런데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제119차 양성평등정책포럼 발표 자료 ‘청년 관점의 젠더 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 대응방안 연구: 공정 인식에 대한 젠더 분석’을 다룬 이 기사는 영어로 번역된 뒤 뜻밖에도 러시아 미디어를 강타했다. 복수의 러시아 매체들이 이 소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전했다. 한국의 평균 연봉이 약 3만달러라면, 러시아는 1만달러 미만이다. 게다가 한국인들이 누리는 표현·집회의 자유를 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은 부러워한다.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매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도 75%나 되는 청년들이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한다니,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참고로,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민을 희망하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비율은 41% 정도다. 사실 젊은이들의 약 3~5할이 보다 부유한 서구나 북유럽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비교적 더 가난한 남·동유럽 나라에서는 보통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 상대적인 고임금 국가 대한민국 청년들의 ‘헬조선 탈출 붐’이야말로 다소 파격적이다.
물론 이 ‘파격’은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아무리 고임금 사회라 해도, 임금보다는 특히 서울의 아파트값이나 사교육 비용들이 훨씬 빨리 오른다. 하위 20% 저소득자라면, 소득 전부를 다 저축한다 해도 서민 아파트를 마련하기까지 무려 21년이나 소요되는 사회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들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겠는가? 여기저기서 아르바이트하고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어 결혼과 육아는커녕 연애마저도 ‘사치’로 보이는 젊은이들한테 이 ‘삼포’(연애, 결혼, 육아 포기) 사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 사회에서 그나마 노후나 직장 안정성이 보장된 공무원과 대기업 직원들은 전체 피고용자의 2할도 안 된다. ‘미래가 보장된’ 이들조차도 종종 과로사를 당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곤 한다. 그러니 중소기업을 다니거나 자영업으로 내몰린 나머지 한국인의 삶은 어떨까? 그야말로 불안의 지옥이다. 말은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회사 자체가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러다가는 자연히 탈출을 꿈꾸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데도 뭔가 여전히 석연치 않다. 한국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신자유주의로 똑같이 몸살을 겪는 나머지 세계라고 해서 과연 무풍지대일까? 지난번에 프랑스의 길거리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펼친 ‘노란 조끼’들의 상당수는 한달에 약 1천유로로 간신히 몸에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면서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기약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신흥 빈곤층이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낭만의 도시 파리는, 만약 그 위성 도시들까지 포함해서 계산한다면 빈곤율이 무려 40%나 된다. 런던의 빈곤율은 27%다. 이민 간다고 해서 ‘헬미국’이나 ‘헬독일’에서 경제적으로 고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거기에다가 인종차별 등의 위험요소를 가산해야 한다. 한국 매체들은 이민 실패담이나 이민 실패를 다루는 경고성 기사들을 꽤 자주 내보낸다. 그런데도 청년들의 75%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한다면, 또 다른 요인이 있으리라고 봐야 한다. 반이민 정서가 갈수록 더 극성을 부리는, 신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 요동을 치는 ‘외국’으로 한국 젊은이들을 내모는 그 힘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는 존엄성에 대한 욕구다.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추울 때 옷을 입고 외로울 때 누군가와 함께 지내고 위험이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 독립에 대한 정치적 열망 못지않게 식민지 현실 속에서 피식민 백성으로서 당해야 했던 일상 속의 수모야말로 독립운동의 아주 중요한 동기였다. ‘조선의용대의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1916~2001) 선생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은가? 문학소년이었던 그는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황금정(오늘날의 명동)의 일본 서점에서 일본 소설책을 사가지고 나왔다가 길거리에서 일본 순사에게 ‘책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었다. 조선 청년이 일본 소설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순사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서점 직원이 책을 정식으로 구입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김학철은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일본인 순사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이 수모를 도저히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김학철은, 머지않아 상하이로 건너가서 무장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나름 재력가 집안의 아들로 명문인 보성고보를 다녔던 그는 일제하에서도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겠지만, 수모를 참고 사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은 먹고살기를 위해서도 가끔 목숨 걸고 위험한 일을 하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도 생명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런데 임금 수준도 꽤 높고 표현이나 집회의 자유도 다행히 쟁취된 이 대한민국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 격으로 각종 불쾌감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고, 피고용자의 자존심을 제대로 살려주는 직장은 과연 얼마나 될까? 통계를 믿는다면, 그다지 많지 않다. 2019년 7월1일 보도된 인크루트의 조사에 의하면 직장인들의 64.3%나 각종 일터 갑질에 시달렸으며, 그 유형은 폭언이나 모욕부터 사적인 용무 지시, 따돌림까지 대단히 다양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직장인 응답자의 60.8%가 ‘갑질이 여전하다’고 느낀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기서 갑질이란 상당한 정신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심각한 인격권 침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갑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사가 권위주의적 태도로 부하 직원들을 심리적으로 억누르고 있다고 느껴지는 직장까지 포함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8~9할이 피해자라고 봐야 할 셈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젊은이들의 ‘탈출’ 욕망을 가장 강하게 부추기는 게 아닐까?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연장자, 권력자들에게 일상적으로 밟히면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이 두려울 수 있지만, 국적이 같은 권력자에게 자존심을 짓밟히는 아픔은 그 두려움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사람이 사람을 밟고 다니는 일터의 분위기를 바꾸자면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등 직장의 민주화부터 절실히 필요하다. 직장이 민주화되지 않는 이상 젊은이들의 한국 탈출 행렬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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