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9 20:33
수정 : 2020.01.10 13:21
방귀희 ㅣ 사단법인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요즘 우리 사회는 억울함에 대한 진실 게임을 벌이고 있는 듯하다. 억울함을 당하는 쪽은 약자다. 억울함은 권력에 의해 진실이 묵살되어 피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공정하지 못함을 넘어 범죄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억울함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관대하여 또다시 억울해진다.
약 30년 만에 소환되어 티브이 무대에서 ‘리베카’라는 데뷔곡을 부르는 가수 양준일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는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말을 해줘요. 감추인 진실 말을 해줘요’라는 가사를 피처럼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지금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멜로디이고 안무는 세련미가 넘친다. 30년 전에 외면당했던 양준일의 음악이 오늘에 와서 환호를 받는 것을 언론에서는 그의 앞서가는 음악 세계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하였지만 30년 전의 양준일 공연 동영상 속의 관객들은 분명히 열광하고 있었다. 그때도 대중들은 양준일 음악을 좋아했던 것이다.
정작 그가 한국 대중음악에서 배제된 것은 대중이 아닌, 그가 인터뷰를 하며 영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방송 출연을 정지하고 그의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자를 문제 삼아 콘서트까지 취소시키며 미국으로 돌아가게 한 작은 권력을 가진 개인의 판단 때문이었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을 이용하여 양준일이라는 뮤지션의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양준일보다 더 잔인한 억울함의 주인공은 화성연쇄살인사건 8차 범인으로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윤아무개씨다. 티브이 화면에서 윤씨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다. 다리를 몹시 저는 지체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장애 원인은 소아마비로 보이는데 소아마비의 특징은 운동신경 마비로 다리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을뿐더러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한다. 그저 천천히 걷는 것이지 달릴 수가 없다. 작은 턱도 뭔가를 잡아야 간신히 올라가는데, 담을 뛰어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나올 때 책상 너머 창문으로 도망쳤다는 범행 정황은 윤씨가 장애인이 아닌 상황에서나 가능하다.
화성에 연쇄살인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자 경찰은 ‘범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남자이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장애인이었으니 윤씨가 기본 조건은 갖추었다고 판단한 뒤,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사회적 지위가 낮고, 보호해줄 부모가 없으며, 배우지도 못해 자기방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범인으로 몰아가기 쉬웠을 것이다.
자기 편하자고 진실을 가공해내는 사람들 때문에 인생을 강도당했는데 재심이 열려도 증거가 폐기되어 진범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보도를 접한다. 범인이 버젓이 있는데 뭘 또 증명하라는 것인지 한심할 뿐이다. 이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윤씨의 억울함보다는 살인마 이춘재가 마치 선의를 베푼 양 생각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해괴한 현상인가.
그나마 양준일의 소환과 윤씨의 사건을 통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진리가 확실해졌기에 희망이 생긴다. 요즘 진실도 왜곡되는 ‘탈진실’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지만 자신에게 정직한 ‘참진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기에 반드시 드러난다.
그럼에도 양준일이나 윤씨처럼 정직한 피해자가 여전히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억울한 일로 인생이 파괴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정함이 특별한 정의가 아니라 상식이 되어야 한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