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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5 17:48 수정 : 2020.01.16 02:36

윤희우 ㅣ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올해는 시작부터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끝날 때도 또 안 좋은 일이 있네요.”

12월 마지막 주에 ㄴ씨가 진료실에서 한 이야기이다. 2019년을 시작하는 시점에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면서 우울증이 시작되었고, 2년째 하고 있는 작은 가게에 나가는 게 너무 재미가 없어졌다며 지난봄 처음 병원을 찾아온 분이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밤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들 수가 없었고, 자존감이 뚝 떨어져 사람들을 대할 때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고 했다. 우울증이 병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스스로가 이겨내야 하는데 너무 의존하는 것 같아” 병원에 오는 것도 자책하며 더 힘들어했던 분이다. 하지만 꾸준히 병원에 다니면서 이제는 술 없이도 잠을 잘 잘 수가 있고, 그리 즐겁진 않더라도 매일 가게를 여는 게 버겁지는 않은 정도까지는 나아졌다. 그러던 중 가게 앞을 지나가는 차가 무리해서 후진하길래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게 벽을 들이받아 부서지는 사고가 난 것이다. 그래서 ‘왜 그 차를 막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후회와 자책을 하며 마치 처음 병원에 올 때처럼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ㄴ씨에게는 2019년이 나쁜 일로 시작해 나쁜 일로 끝나고, 한해 전부가 나쁘게 기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울 증상도 많이 나아지고 일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분명 한해 좋은 일이 많이 있었고, 이번 사고의 책임 역시 사고를 낸 운전자에게 있었으니 그리 자책할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지금 ㄴ씨의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기억과 후회하는 마음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이는 우리의 뇌가 부정적 감정의 경험을 더 잘 기억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끄럽거나 화나거나 때로 두렵기도 한 경험은 어떻게 보면 다시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감정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편도(amygdala)라는 부분이고, 기억을 담당하는 핵심 부분인 해마(hippocampus)와 바로 맞닿아 있다. 그래서 부정적 감정과 연관된 일들은 강하게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강하게 남은 기억이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후회스러운 감정을 일으켜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심한 경우 우리의 뇌가 부정적 기억 속에 잠겨 우울의 고리에 빠져들게 하고, 마치 색안경을 낀 것처럼 왜곡된 시야로 향후 일어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그래서 ‘앞으로는 실수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지’라고 계획을 세우는 마음보다는 ‘분명 비슷한 실수를 또 할 텐데’라고 걱정에 빠져드는 마음이 앞선다. 이런 걱정은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고 우울한 감정은 더 깊은 걱정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적절한 시점에 우울의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정말 깊은 하강나선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첫째로는 내게 벌어진 일을 ‘객관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가 후회하고 있는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다 치고 그에게 어떤 조언을 할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책에 빠지지 않고 일어난 사건의 내용 자체만 들여다볼 수 있어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또 한가지 방법은 기억에 긍정적인 감정을 덧씌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에게 심하게 혼나던 중에 옆자리 사람이 방귀를 뿡 하고 뀌었다면, 혼났다는 부정적인 기억에 방귀라는 우스운 기억이 끼어드는 것인데 이것만으로도 부정적인 기억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인위적인 감정일 수도 있지만, 작지만 긍정적인 자극을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강한 부정적인 감정이 일으키는 우울한 기억의 하강나선을 막을 수도 있다고 한다.

ㄴ씨와도 이 방법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후회 감정이 커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서서히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진료실을 나갈 때쯤에는 이제 사고 처리를 어떻게 할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부정적인 일이 또 생기면 하강나선의 입구가 쓱 드러나겠지만, 부정적인 고리 끊기 연습을 계속하면 언젠가 ㄴ씨 혼자서도 쉽게 고리를 끊어내는 날이 오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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