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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정치 과열 시대의 정치 / 신진욱

등록 2020-01-21 18:18수정 2020-01-22 09:46

신진욱 ㅣ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금 한국은 가히 정치 과열의 시대라 할 만하다.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기 위해 연인원 1700만명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고, 그 탄핵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3년째 주말마다 태극기를 들고 모인다. 광화문, 서초동, 여의도가 전부 정치 집회장이고, 직장, 술집, 명절 밥상이 다 정치 공론장이다.

나쁘지 않다. 온 국민이 정치의 주인이 되어 참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생기를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열기가 파괴적이 되지 않으려면, 더 나은 정치에 대한 상상과 변화의 비전이 필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정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좋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다. ‘우리’를 지키는 것보다, ‘그들’을 이기는 것보다, 우리 모두의 공동체가 향해야 할 곳을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 세기 전에 사회학의 거장들은 정치가 단지 이익추구와 권력투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집단적 목표와 공동의 가치를 정의하는 문제에 관련된다는 것을 통찰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1912년에 쓴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전통사회의 종교적 믿음처럼, 현대에도 신성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받는 것들이 있음을 강조했다. 개인의 존엄,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 가치들이 그러하다.

어떤 사회를 추구할 것인가를 둘러싼 숙의와 갈등은 정치의 본질에 속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는 1922년에 쓴 <역사주의와 그 문제>에서 사회적 이상을 명료히 하고 현실로 조직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이 고대국가 때부터 인류사회 정치 동학의 동력이었다고 주장했다. 정치가 지향할 미래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 정치는 목적 없는 권력투쟁이거나 영혼 없는 관료 기계다.

지금 한국에서는 여와 야, 또 그 지지자들이 마치 불공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듯이 거칠게 서로 공격하며 다투는 대립이 계속되는데도, 정작 이 나라 정치가 사회의 긴급한 문제와 도래할 위기를 어떻게 풀 것이며 장기적으로 어떤 국가를 지향할 것인지를 놓고 진검승부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한국 정치의 오래되고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고 예방하는 국가의 공적 책임과 역량의 발전이 극도로 지체되었다는 점이다. 그 예로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인 1979년에 정부 복지지출은 국내총생산의 1.9%에 불과했고, 1인당 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선 2000년에도 고작 4.5%였다. 2020년 현재에도 정부의 조세 규모, 정부 지출 중 복지 비율, 공적 이전을 통한 재분배 효과가 선진국 중 최저다.

아직 ‘파이’가 충분치 않아서일까? 아니다. 독일은 1인당 소득이 2만달러를 돌파한 1973년에 이미 국내총생산의 21.6%를, 스웨덴은 1인당 소득 2만달러를 넘어선 1970년에 16.8%를, 3만달러가 된 1995년에 30.6%를 정부 사회보장에 썼다. 이처럼 많은 선진국이 산업화 초기부터 복지지출을 국내총생산의 25~35% 정도가 될 때까지 꾸준히 끌어올렸다.

말하자면 복지국가는 풍요의 부산물, 잉여의 장식품이 아니라 잉여와 결핍을 모두 나누며 공동의 풍요로 가는 정치 원리였다. 지금의 우리보다 가난했을 때도 복지국가들은 복지국가였다. 한국은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함께 잘사는 사회를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한 법제와 조세, 지출과 투자를 계속 유예해온 것이다.

변화는 뒤늦게 시작됐다. ‘불평등’ ‘복지’ ‘빈곤’에 관한 국내 8개 중앙일간지의 기사 수를 조사해보면 1990년대에 연간 2000~3000건에 그치던 것이 2019년엔 2만127건으로 급증했다. 2000년대 한국 정부의 복지지출 증가율은 선진국 중 최고였고, 정부의 재분배 역량 역시 조금씩 늘고 있다.

하지만 공존을 위한 노력이라는 면에서 한국의 발전은 여전히 더디고, 공존이 붕괴하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더 빠르다. 부와 안정은 소수에 집중되고 있고 불안정한 삶이 많은 평범한 사람의 ‘뉴 노멀’이 되고 있다. 밀려난 사람들은 절박하고, 밀려나지 않은 사람들은 불안하다.

이런 공동체의 중대 문제에 응답하고 해법을 내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면, 지금 한국 정치는 얼마나 목적에 충실한가? 정치 대립은 단지 아(我, 나)의 권력을 위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돌보는 정치 본연의 목적을 놓고 일어나야겠다. 정치 과열 시대에 불길이 만약 이 방향으로 퍼질 수 있다면 꽤 유익한 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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