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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어느 모녀의 가난한 서류 / 박진

등록 2020-01-27 18:13수정 2020-01-28 09:29

박진 ㅣ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모녀는 한눈에도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손에는 묵직한 쇼핑백과 분노에 찬 결기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상담자를 고성으로 제압하려는 듯 대한민국 모든 사정기관과 육법전서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건 개요는 3년 단위로 건너뛰다 플레이 백 하는 험난한 비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목소리 낮추고 천천히 말하지 않으면 도와드리기 어렵다”고 하자 쇼핑백에서 서류를 꺼내기 시작했다. 설핏 보기에도 1심부터 대법까지 거쳐 온 사연 많은 종이들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소송에 관한 한 선무당이었다. 그들이 잡는 사람이 경찰이나 검사, 판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제일 먼저 잡고 마지막까지 쥐 잡듯 잡은 사람은 자기 자신들이었다. 귀퉁이가 해어질 대로 해어진 서류조차 가난했다.

딸의 인생은 5100만 인구 속에 숨겨놓으면, 아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삶의 별 탈 없음에 감사한 마음은 고사하고 무료함마저 느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 딱 하루, 그 하루는 인생을 확연히 갈라놓았다. 일하던 회사의 사장님 재판에 증인으로 서게 되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절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을 뿐이라 한다. 문제는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를 말하며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는 선서에 따라 위증으로 인정된 그의 진술은 범죄가 되었다. 위증죄는 인정된 순간 무거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가 본 것이 맞다”고 증언한 경찰이 있었기 때문에 유죄였다. ‘위증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그는 진술한 경찰에 대해 고소를 하고 경찰 감사관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위증죄에 대한 1심, 2심, 3심, 재심 서류를 작성했다. 불행의 씨앗이 된 사장의 재판까지 모두 첨부에 첨부 또 첨부됐다.

하지만 단 한장의 서류도 인생의 시계를 이전으로 돌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경찰의 거짓말로 딸아이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으니 저 무도한 경찰과 비호하는 공권력을 처단해달라며 서류를 자꾸 내 코밑에 들이밀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속한 도시의 도지사와 시장까지 모두 찾아갔고, 청와대 청원 게시판과 유력 정치인들 사무실까지 들렀다 온 문서 어디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들를 수 있는 모든 곳을 들러 파김치처럼 축 늘어진 사람들, 인생이 송사에 ‘염장’당해 싱싱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인권단체다.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이후엔 인권위까지 두루 들러서 온다. 그러니 법적이나 공적으로 무언가를 되찾을 가능성은 지하 수백 미터 아래 암반수 지층 공기만큼 희박하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는 옳은데, 자신들이 겪은 시스템은 모두 틀렸고 공무원들은 깡그리 부패한 사람들이라 주장하니, 수긍은 되지만 맞기만 할 리 없다.

그러나 그들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제대로 변론할 기회나 변명할 기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국가의 조세 창고를 수조원 강탈한 범죄자들에게조차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전지전능한 법조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위증죄’가 얼마나 엄중한지 자세히 조언하고 주의를 주었다면 그의 인생이 지금처럼 저렇게 되었을까. 식당 노동자로 일하고 남는 시간을 쪼개 어머니와 함께 경찰서부터 재심 법원까지 찾아 헤매며 살게 되었을까.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의 생애를 모두 털어 ‘정의’를 세우겠다는 검찰과 인사권을 통해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현 법무부 장관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법과 제도는 바뀌어야 한다. 엉킨 매듭의 처음과 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을 바꾸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우리 사무실 같은 곳을 찾는 벼랑 끝 사람들의 송사 인생은 반복된다. 그것을 막을 수 있다고 희망하는 낭만이 내게 남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어딘가를 전전하고 있을 모녀의 하찮고 비루한 사연이 당신들 개혁의 파노라마에 있은 적 있냐, 묻고 싶어졌을 뿐이다.

길고 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식사는 하셨냐 물었다. 그러자 마흔을 훌쩍 넘은 그는 어린아이처럼 오래 울었다. 가난하고 초라한 서류 더미에는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만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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