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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땅에 대한 예의 / 노은주·임형남

등록 2020-01-28 18:12수정 2020-01-29 02:36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부동산은 교육과 더불어 현대에 새로 추가된 신흥종교이며,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가장 강렬하고 영향력이 강한 신앙이다. 사람들은 땅에 무엇을 심어놓지도 않고는 무한한 과실이 달리기를 원한다. 기대에 부응하여 땅의 가치는 계속 올라간다. 나이를, 계층을 불문하고 그 돈독한 신앙심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은 경이로울 정도다.

지난해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대학에서 강연했던 적이 있다. 건축과 학생들과 더불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약간 당황스러웠다. 아마 한류의 영향도 있었을 텐데, 진지하게 듣는 그들의 열의에 감복하여 열심히 이야기했다.

강연이 끝나고 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첫번째 질문은 “건축에서 왜 땅이 중요하다는 것인가?”였다. 강연 중에 “건축은 땅에서 시작되므로 땅과의 타협이 중요하고, 건축가는 반드시 땅에 대한 존경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강조했기 때문인 듯했다.

오히려 우리는 반문했다. “왜 땅이 중요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국토 면적은 22만㎢이므로 그렇게 넓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산지가 많아 골이 깊고 무척 오래된 땅이라 사연이 많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땅에는 주름이 많다. 예전에 산속에 있는 땅을 사서 농장을 만들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한참 흙을 덮어 평지로 만든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큰비가 한번 오자 빗물이 모여들어 다시 원래의 물길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많은 비용을 들여 정리한 일이 허사가 되었다고 한다. 땅의 주름은 인간이 보톡스를 맞아 주름을 없애듯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농부와 더불어 ​건축가는 땅에 기대어 산다. 건물을 짓기 위해 많은 땅을 만나 분석하고 설계하며 일을 진행하는데, 간혹 건축은 땅에 업을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번도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숨 쉬며 잘 살던 땅을 파헤치며 공사를 시작할 때는 좀 미안해진다.

그럴 때 조상들은 땅의 수호신에게 드리는 개토제(開土祭)를 열고 고유제(告由祭)를 지내 ‘땅’한테 양해를 구하며 시작했다. 그건 땅이라는 자연 혹은 어떤 다른 존재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땅의 장구한 역사에 비해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땅에 감사해야 하고 늘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오랫동안 전해져온 땅에 대한 우리의 기본 인식이었다.

땅에 담긴 이야기와 시간이 가진 힘을 존중하자는 것이지, 옛사람들처럼 제를 올리자는 것도 아니고 풍수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땅을 그저 가치가 오를 곳을 찾아 투자하고 적당한 시기에 되팔아 수익을 창출하는 화수분으로만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나에게 맞는 땅을 찾고 그 땅과 교감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기댈 자리를 허락해준 땅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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