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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새로운 조합 / 주상영

등록 2020-02-06 18:26수정 2020-02-07 15:04

주상영 ㅣ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벤 버냉키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시절에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양적완화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1월4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서 ‘새로운 통화정책 수단’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강연을 했다. 의장직에서 물러난 지 6년이나 흘렀지만 프린스턴대의 경제학 교수 출신답게 학구적인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책임감을 내려놓지 않고 구체적인 정책 수단을 모색하는 자세도 존경할 만했다.

버냉키가 한 그날 강연의 주요 내용은 양적완화와 아울러 중앙은행이 향후 금리 방향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선제적 안내(forward guidance)가 효과성이 입증된 정책수단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었지만, 통화정책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특히 성장률이 낮고 인플레이션과 금리도 낮은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대응 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단기금리는 물론 장기금리를 인하할 공간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경우에도 약간의 여력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기준금리는 1.25%이고 장기국채 금리도 1% 중후반 수준이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처럼 국제통화 지위를 갖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의 국외 유출 가능성을 고려할 때 기준금리를 제로까지 내리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설사 기준금리를 내릴 여지가 조금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 하락을 막지 못하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요국의 거의 모든 중앙은행 당국자들은 약간의 인플레이션, 가령 2%를 넘지 않으면서 그에 근접한 정도의 인플레이션이 별 부작용 없이 경제의 활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주체들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다. 기대가 실제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기대를 적절히 높은 수준에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여기서 중앙은행의 고민이 깊어질 수 있다. 금리 인하는 유동성 확대에 의한 물가 상승을 유발하므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정책금리가 4%인데 이를 2%로 낮추면 실물경기와 인플레이션 기대를 자극하는 효과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금리가 1% 내외로 낮은 상황에서는 추가적으로 인하할 폭도 제한적인데다 자칫 금리 인하가 장기적 경기침체의 시그널로 읽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금리를 내려도 인플레이션 하락 추세를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금리를 제로로 내리고 양적완화를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가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더라도, 늘어난 유동성이 금융 부문에서만 돌아다니거나 이미 존재하는 실물자산인 부동산으로 쏠리는 허망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양적완화 정책이 성공한 것은 오바마 정부의 확장 재정과 트럼프 정부의 감세 정책이 총동원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양적완화에 힘입은 큰 폭의 주가 상승이 소비 증가로 이어진 것이 주효했으며, 국제통화를 찍어내는 국가로서 자본 유출을 우려할 이유가 없는데다 대규모 재정적자를 감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정부 부채 수준이 높지 않기 때문에 당분간은 확장적인 재정정책 기조를 유지할 수 있어서 당장 통화정책 대응이 급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경우 금리의 실효하한이 제로가 아니라는 점, 정부 부채를 미국이나 일본처럼 마냥 늘려나갈 수는 없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책 조합을 미리 구상할 필요가 있다.

이번 전미경제학회의 강연에 담지는 않았지만 버냉키는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유동성의 일부를 재정지출이나 감세 재원으로 활용하여 실물경기를 직접 자극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연준 부의장을 지낸 바 있으며 매사추세츠공대(MIT) 재직 때 버냉키와 그레고리 맨큐 등 걸출한 제자를 다수 배출한 스탠리 피셔도 최근에는 중앙은행이 긴급재정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통화정책을 직접 다루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누구보다 지지해온 탁월한 경제학자들도 다음번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지 걱정하면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새로운 조합을 고민하고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 정부와의 협력 모델을 만들지, 이제는 우리도 드러내놓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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