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ㅣ 사회학자
“늙은 중국인들은 우리들에게 가끔 미소를 지었다… 어른들은 무관심하게, 그러나 경멸하는 어조로 ‘뙈놈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밀수업자, 아편장이, 누더기의 바늘땀마다 금을 넣는 쿠리(이주노동자), 그리고 말발굽을 울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원수의 생간을 내어 형님도 한 점, 아우도 한 점 씹어 먹는 오랑캐,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 뒤를 보면 바지도 올리기 전 꼿꼿이 언 채 서 있다는 북만주 벌판의 똥덩어리였다.”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 일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의 신산한 삶을 다뤘다. 주인공 소녀의 가족은 아버지 일자리를 찾아 중국인 거리로 이사 왔다. 이들에게 이웃 중국인은 어떤 존재일까? 지상의 모든 사악함이다. 중국인 혐오는 역사가 깊다.
중국 우한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일로다. 중국인 혐오도 넘쳐난다. 역시나 일부 언론은 교묘히 혐오를 부추긴다. 혐오에 맞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목소리도 높다. 올바르되 충분하지는 않다. 잘못일지언정 대중의 혐오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들과 치열하게 대면해야 한다.
1931년 7월의 ‘만보산사건’과 화교배척사건을 되돌아보자. 중국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에서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물길을 두고 싸움이 났다. 중국 관헌과 일본 영사경찰이 개입했다. 7월2일 <조선일보> 장춘 주재원이 본사에 급전을 쳤다. 중국 관헌이 조선 농민 다수를 살상했다고. <조선일보>는 호외를 뿌렸다. 분노한 조선인들이 전국에서 중화요리점을 부수고, 호떡집에 불을 질렀다. 사람들을 린치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통계로 119명, 중국 정부 발표로 142명, 총독부 비공식 집계로 200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더 많은 중국인이 다쳤고, 수많은 가옥과 재산이 파괴됐다.
호외는 오보였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미구에 사실이 전해졌지만 대중의 손에는 이미 선혈이 낭자했다. 한국 언론사상 최악의 오보로 꼽힌다. ‘우리의 가해자 됨’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도 꼽힌다. 맞다. 하지만 말할 것이 조금 더 있다.
조선인들이 그저 호외 하나에 부화뇌동했을까? 아니다. 화교배척사건은 이미 전례가 있었다. 1927년 12월 초중순에 전북, 전남, 충남, 서울, 인천에서 배화시위가 있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고 큰 재산 피해가 났다. 역시 재만 조선인에 대한 중국 관헌의 탄압이 계기였다.
화교사 연구자 이정희 교수는 <화교가 없는 나라>에서 중국인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일상에서 퍼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화상은 상권을 침식했고, 화농은 근교농업을 개척했다. 특히 싼 임금에 성실한 화공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화교는 일본말만 배우고 조선말은 배우지 않았다. 혐오는 잘못이고 학살은 용서 못 할 범죄지만 아무 이유도 없던 건 아니다. 죄 없는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정치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논문 ‘다문화주의, 또는 다국적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에서 다문화주의는 “비판적 에너지가 자본주의 세계 체계의 근본적 동질성은 그대로 둔 채 문화적 다양성 투쟁을 향해 대리 출구를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다문화주의는 자본과 노동력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시대를 반영하되 그 모순도 감추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노동자들이 서로 다툴 때 자본은 웃는다.
지제크의 비판에 전폭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나도 그렇다. 혐오에 대한 반대와 문화들 간의 공존은 소중한 가치다. 동시에 혐오를 생산하고 확대하는 현실의 모순도 직시해야 한다. 지식인과 언론은 내·외국인의 노동시장 분리를 거론하며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뺏는다는 공포가 환상이라고 계몽하곤 한다. 과연 어떤 교수도, 기자도, 중산층도 자기 일자리를 외국인에게 빼앗기리라고 걱정하지 않는다. 환상일지언정 하층계급은 그 공포에 시달린다. 노동시장 분리가 사실이어도 문제지만 실은 그 공포는 이미 환상이 아니다. 예컨대 건설현장에서 이주노동자 문제는 다단계의 하도급 문제와 얽혀 있고, 한국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다.
노파심에 말한다. 외국인 혐오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사실은 함께 싸워야 한다. 그래서 모순에 눈감고 도덕에 호소하는 문화 공존론은 아름다울지언정 대안이 아니다. 힘겨워도 자본주의 세계 체계의 모순과 급진적 재구조화를 말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