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국 ㅣ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세계 경제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선진국들이 모두 일본처럼 될 것이라는 ‘일본화’에 관한 걱정이 그것이다. 일본은 1990년대 초 거품(버블) 붕괴 이후 오랫동안 장기 불황과 디플레, 그리고 저금리가 지속되었고 여러 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이 정체되었다.
현재 세계 경제의 모습을 보면 이해할 만도 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중앙은행의 노력에 힘입어 경제 붕괴는 피했지만 이후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총수요 둔화로 인플레도 금리도 낮지만 양적 완화나 마이너스 금리와 같은 비전통적 통화정책도 한계가 크니 재정 확장이 필수적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이제 다음번 불황이 닥치면 어떤 거시경제정책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견이 분분하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들도 일본처럼 고령화가 진전되어 성장이 둔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실제로 일본의 장기 정체는 인구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일본의 생산가능인구는 1995년 정점에 이른 뒤 감소해왔는데 이는 당연히 경제 전체의 생산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고령화는 경제의 소비와 수요에 악영향을 미치고 노동자들이 나이가 들면 생산성 상승이 둔화될 수 있다.
하지만 고령화와 함께 기업이 투자를 늘리고 더 나은 기계를 사용한다면 노동생산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실제로 노동자의 시간당 산출로 측정되는 일본의 노동생산성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썩 나쁘지 않았다. 1997년에서 2018년까지 일본의 노동생산성은 약 28% 상승하여 미국이나 스웨덴보다는 낮았지만 영국이나 독일보다 약간 높았다.
각국의 자료를 비교하는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아제모을루 교수 등의 최근 실증연구도 1990년에서 2015년까지 고령인구 비중의 증가가 1인당 국내총생산 성장률에 일반적으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고령화가 빠르게 진전된 나라들이 산업용 로봇을 더 많이 도입하여 생산성을 높였다고 강조한다. 즉 고령화로 인해 세계 경제가 이른바 구조적 장기 정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브라운대의 에게르트손 교수 등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그것이 사실이지만 금리가 제로에 가깝게 낮아진 위기 이후에는 고령화가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제로금리 이전에는 고령화가 저축을 증가시키고 실질금리를 낮추어 투자를 촉진할 수 있지만, 명목금리가 제로에 도달하고 인플레가 낮은 현재는 고령화가 더 이상 금리를 낮추지 못하고 과잉저축을 낳아 성장에 미치는 악영향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연구는 금융위기 전후 고령화가 투자에 미치는 효과가 달라졌는지 증거가 부족하고 위기 이후의 기간이 짧다는 점에서 한계도 있다. 그러나 불평등 심화 등으로 총수요가 부족하여 제로금리와 장기 정체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고령화가 진전되면 경제의 일본화의 위험이 심각해진다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총수요 둔화와 관련하여 일본에서 특히 중요한 요인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불균형이었다. 사실 일본 경제의 문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임금상승률이 훨씬 낮았다는 것이다. 2017년 일본의 시간당 명목임금은 1997년과 거의 같았는데 미국은 약 90%, 독일은 약 50% 상승했다. 반면 일본은 한국과 함께 선진국 중에서 1990년대 이후 기업의 이윤과 저축이 가장 높아진 나라지만 투자는 그만큼 증가하지 않았다. 이는 아베노믹스 이후도 마찬가지여서 일본 기업의 현금 보유는 2013년 이후 3배 이상 늘어나 2019년 3분기에 약 506조엔을 기록했다.
결국 생산성 상승의 과실이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못하여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했고, 아베노믹스 이후에도 임금상승이 부진하여 노동자의 몫은 더욱 작아졌다. 이는 노조조직률이 하락하고 구조조정이 확대된 노동시장의 변화와 관계가 크다. 일본의 비정규직 비율은 1990년 약 20%에서 2018년 약 38%로 계속 높아졌고 임금불평등도 커졌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를 억누르고 총수요를 둔화시켜 경제의 회복과 성장을 가로막은 요인이었다.
급속한 고령화와 함께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는 한국도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피할 수 없는 흐름인 고령화의 악영향을 과도하게 겁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험은 일본화라는 유령을 피하기 위해 분배의 개선 등 총수요 확대를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