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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호주 원주민은 ‘에일리언’이 아니다” / 조일준

등록 2020-02-12 20:08수정 2020-02-13 02:44

“그들을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헌법이 규정한 ‘에일리언(이방인)’으로 볼 수 없다.”

지난 11일 호주 최고법원이 ‘애버리지니(호주 원주민)’는 호주 시민권자가 아니라도 정부가 함부로 추방할 수 없다고 결정한 판결의 핵심이다. 이날 호주 고등법원은 연방정부가 외국 태생의 호주 거주자 2명을 추방하려던 방침에 제동을 걸었다. 재판관 7명 중 4명이 애버리지니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그들의 전통적 법과 관습의 중심인 호주 영토와 특별한 문화적, 역사적, 정신적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이는 관습법으로 인정된다”며 “그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는 건 연방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판결이 떨어지는 순간, 꼬박 501일째 ‘불법이민자 구금센터’에 갇혀 있던 브렌던 톰스(31)도 즉각 풀려났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6살 때 호주에 왔다. 어머니가 호주 원주민 혈통이다. 이제 더는 추방당할 우려 없이 호주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와 함께 법정에 섰던 대니얼 러브(40)는 파푸아뉴기니 태생으로 5살 때부터 호주에 거주한 원주민 후손이다. 이들은 각기 별개의 폭력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형기 복역을 마쳤으나, 그 이후엔 추방 대상자로 분류돼 다시 강제구금됐었다. 지난해 총선에서 집권한 보수당 정부가 범죄로 1년 이상 복역한 비시민권자를 추방하도록 이민 규제를 강화한 결과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버리지니 남성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정부의 홍보 사진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공원관리청 누리집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버리지니 남성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정부의 홍보 사진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공원관리청 누리집
이들의 변호인들은 이번 판결이 호주에서 원주민들의 고유한 지위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이라며 환영했다고 호주 <에이비시>(ABC) 방송은 전했다. 호주 정부의 반응은 모호하다. 앨런 터지 이민부 장관대행은 현행 이민 정책의 재검토 필요성을 언급하며 “법원이 호주 시민도, 비시민도 아닌 제3의 범주를 창설했다”고 말했다. 집권 보수당의 스콧 모리슨 총리는 앞서 2013~14년 이민·국경보호 장관을 역임할 때부터 이주자와 난민에 대한 강경 정책을 펴왔다.

1788년 영국 함대가 지금의 시드니 항구에 첫 발을 들이기 전까지, 호주 원주민들은 4만7000년 동안 고유의 문화와 언어, 풍습을 유지해온 주인이었다. 새로 호주 대륙의 주인이 된 백인들은 매년 1월26일을 ‘오스트레일리아의 날‘로 지정해 건국 기념일로 축하한다. 그러나 호주 애버리지니 공동체는 그 날을 ‘침략일’ 또는 ‘살아남은 날’이라고 부른다. 지난달 26일은 그로부터 232년이 지난 흐른 호주의 국경일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수도 캔버라에 백인들의 무단 점령과 자신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세운 비공식 상설기구인 ‘애버리지니 천막 대사관’ 앞에서 학생들이 애버리지니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플리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수도 캔버라에 백인들의 무단 점령과 자신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세운 비공식 상설기구인 ‘애버리지니 천막 대사관’ 앞에서 학생들이 애버리지니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플리커
1971년 애버리지니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한 깃발도 따로 만들었다. 위아래를 이등분한 직사각형이다. 윗쪽 검정색은 ‘애버리지니 사람들’을 뜻한다. 아래 빨강색은 붉은 대지와 그 땅에 뿌리박은 사람들의 정신적 관계를 상징한다. 가운데 노란색 원은 뭇 생명의 원천이자 보호자인 태양이다. 호주 정부는 집권당 성향을 막론하고 애버리지니 공동체와의 화합을 강조한다. 애버리지니 기는 국가의 공식 기 지위를 인정받는다. 수도 캔버라의 연방의회 건물에는 이 깃발이 호주 국기와 나란히 휘날린다. 그러나 지금 애버리지니는 호주 인구의 3%에 불과하며, 대부분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살아간다. 호주인 평균보다 짧은 수명, 인구 대비 높은 수감률은 이들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위 재판에서 톰스를 대리한 클레어 깁스 변호사가 판결 뒤 기자들에게 한 말은 우리도 되새겨볼 만하다. “이번 재판은 시민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가 이곳에 속하는지, 누가 호주 공동체의 일부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다수 기득권층의 혈통이나 시민권이 아닌 ‘살아온 공동체’에 소속될 권리를 강조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선의로 다가오는 이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건 일단 제쳐두고라도, 최소한 선입견 없이 귀를 열 준비는 돼 있는 걸까? 이주노동자와 난민, 유학생과 등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외국 출신의 사람을 ‘타자’로 삼고 외계인 보듯 하는 차별과 배제, 혐오는 글로벌 시대에 폼도 나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다.

조일준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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