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진 ㅣ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최근 가장 속 시원한 소식 중 하나는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이 아닌가 싶다. 꿈의 무대로만 보이던 아카데미상을 그것도 4개 부문을 수상한 것은 정말 놀라울 만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연세대 학보지인 연세춘추에 만평 ‘연돌이와 세순이’를 연재하던 대학생 봉준호가, 전세계에서 인정받는 영화 거장이 된 과정은 놀랍고 신비하기까지 하다.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저러한 거장이 탄생하고 성장한 것일까?
한 사회에 특정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드물지만 태어난다. 재능을 가진 아이가 부잣집에 태어난 경우에는 별문제가 없다. 부모가 이것저것 시켜가면서 능력을 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능력 있는 아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경우이다. 부모가 아이의 재능을 실현시켜줄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부모가 은행에 가서 아이의 천재적 재능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빌린 돈으로 아이를 교육하고 아이가 성장한 뒤 대출금을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아이는 재능을 꽃피울 수 있어 좋고, 사회는 그러한 재능을 향유할 수 있어 좋다. 물론 은행도 대출 이자를 받을 수 있어 손해 볼 일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은행 대출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의 재능을 보고 대출을 해줄 은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개입해서 은행의 역할을 대신하면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개선할 수 있다.
영화시장에는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 재능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회를 잡는다 해도 첫 작품부터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개는 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좋은 감독, 좋은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실패를 통해 인적자본을 쌓을 곳이 필요하다. 영화라는 것이 일종의 벤처투자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어 과소투자되기 마련이다. 시장에서 채워주기 어려운 영화 투자를 정부가 메워준다면 영화시장의 효율성을 개선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를 출범(이전엔 영화진흥공사)시킨 이후 영화시장 활성화를 위해 정부의 많은 지원과 투자가 있었다. 2006년에는 모태펀드에 문화계정이, 2011년에는 영화계정이 만들어지면서 영화에 대한 투자가 본격화되었다. 모태펀드란 펀드들의 펀드라는 뜻이다. 정부가 일정 금액을 투자하되 어느 영화에 투자할지는 민간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일종의 간접 투자이다. 최근 정부가 밝힌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취지와도 맞닿아 있는 지원 방식이다.
영화를 보는 소비자는 잘 몰랐겠지만, 한국 영화에는 상당히 많은 모태펀드의 투자가 있어왔다. 한국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에 투자자들 리스트가 올라가는데, 그중에 모태펀드의 자금을 지원받은 자펀드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좀더 정확하게는 2006년부터 2019년까지 1조2천억원 정도의 자금이 모태펀드로부터 한국 영화에 투자되었다. 대략 연간 900억원 이상 투자된 것이다.
일부는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일부는 실패하기도 하였다. 모태펀드로부터 투자받은 영화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도 다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명량>이다. 컴퓨터그래픽 전문펀드에 투자된 금액을 포함해 총제작비의 38%에 이르는 금액이 투자되었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공조>, <범죄도시>, <청년경찰> 등도 모태펀드의 투자를 받은 대표적인 영화들이다. 더 나아가서 모태펀드는 중저예산 영화와 제작 초기의 영화에도 투자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잘 몰랐겠지만 모태펀드가 한국 영화의 중원을 이끌어온 수비형 미드필더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다시 봉준호 감독 얘기로 돌아가 보자. 봉 감독의 과거 작품 중 세 작품이 모태펀드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괴물>이 총제작비 143억원의 7%를, <마더>는 총제작비 93억원 중 약 22%를, <설국열차>가 총제작비 530억원 중 3분의 1 정도를 모태펀드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기생충>은 모태펀드로부터 투자를 받지는 못했다. 대기업인 씨제이(CJ)에서 투자했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이제 모태펀드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봉준호’ 이름만으로도 얼마든지 투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의, 제3의 봉준호가 나오길 기다리며 한국 영화의 ‘히든 피겨스’인 모태펀드의 역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