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2020년 2월24일 대구시민이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 수가 급증하는 가운데 법원도 비상운영에 돌입했다. 전입 법관 환영 오찬은 취소되었고,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시차제로 먹는다. 재판 일시를 변경하고 근무일정을 조절한다. 생필품을 사거나 밥을 먹으러 가게에 가면 손님이 별로 없다. 홀 영업은 중단한 채 포장과 배달만 하는 가게도 상당하고, 아예 휴업에 들어간 곳도 많다. 마주치는 분들은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고, 행동이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대구에서 일상은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언론과 타 지역에서 관찰되는 “대구”는 내가 느끼는 대구와 다르다. 훨씬 더 혼란과 공포에 질린 도시로 표현되는 것 같다. 보면서 저 혼란과 공포는 대구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 지역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갈 일이 생긴 동료 한 분은 가족으로부터 ‘아파트 입주자들이 불안해할 것이니 서울과 대구 중간 어디 휴게소에서 접선하자’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아파트 입주자들이 얼마나 공포에 질려 있으면 가족에게 접선 요청까지 하게 된 걸까 싶어 마음이 짠했다.
어찌 보면 이유 없는 공포는 아니다. 대구·경북의 확진자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확산 속도도 빠르다. 아직은 특정 종교 클러스터 중심으로 확진자가 발견되고 있지만 바이러스가 종교를 가리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에 사는 사람들이 이마에 “나는 안전함”이라고 써 붙이고 다녀도 믿기 어려울 것 같다. 지역사회 간 이동도 자제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안전할 것이다. 따라서 그 공포에 질린 반응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대구·경북 거주자들에 대한 집단적 인식과 그에 따른 분리·배제 시도는 서글플 뿐만 아니라 우려스럽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혐오’에 관한 탁월한 분석 기사 ‘혐오, 선을 넘다’(<시사인> 649호)에 따르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혐오를 부르고 이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 혐오가 ‘정확한 위험원’에 대해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험원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정밀한 차단을 행하는 대신 위험을 특정 집단에 투사한다. ‘내가 속하지 않은’ 가장 넓은 집단을 외(外)집단으로 설정하여 이를 위험으로 분류하고 내(內)집단과의 분리 및 배제를 시도한다. 이러한 분리 및 배제 시도는 자의적인 집단 설정으로 인하여 합리성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합리성이 결여된 집단적 분류 및 분리·배제 시도를 규범적으로 표현하면 ‘차별’이다.
바이러스 확산과 함께 사람들을 집단으로 분류하여 위험으로 인식한 후 그 집단에 대한 분리와 배제를 시도하는 현상이 빈번해지고 있다. 바이러스 유입 위험을 줄이기 위한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 주장은 쉽게 ‘중국인’에 대한 집단적 분류 및 분리·배제 시도로 이어진다. 국내 확진자들의 감염경로를 살펴볼 때 중국인에 의한 2차 다수 감염 및 대규모 확산이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두려움을 동반한 차별은 가라앉지 않는다. ‘신천지’교의 행사가 감염의 대규모 확산 원인이 되자 그 신자들이 위험으로 인식된다. 그 종교 신자들 중 바이러스 확진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그들이 방역체계에 들어왔기 때문일 텐데 정부의 방역체계에 비협조적인 사례만이 전부인 양 신자 전체에게 비난이 쏟아진다. 심지어 방역체계 비협조에 대한 비판보다 바이러스와 무관한 교리나 활동 등을 근거로 한 비난이 더 많아 보인다. 신천지교 신자라는 것 자체가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르는 기준이 되다 보니 자가격리 기준을 충족함에도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 자가격리나 신고를 기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방역의 또 다른 위협이 되고 있다. 혐오 및 분리·배제가 방역에 실질적인 위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증사례로 볼 만하다. 여기에 이어 대구·경북도 위험으로 인식되는 집단적 분류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 특정 국적과 특정 종교와 특정 지역이 선긋기의 기준을 놓고 삼파전이라도 벌이게 되는 것일까. 상상만 해도 슬프다.
우리 헌법은 사람을 분류해놓지 않았다. 차별은 규범적으로도 허용되지 않지만, 성공적인 방역과 사회복구를 위해서도 본능적인 두려움이 비합리적인 혐오로 번지는 것을 끊을 필요가 있다. 안전을 위한 논의가 사람에 대한 집단적 분류, 분리 및 배제로 흐르지 않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