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원 ㅣ 24시팀 데스크
16세기 찬란한 아스테카 문명을 무너뜨린 건 천연두였다. 아즈텍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의 함대가 내세운 무력보다 그들과 함께 도착한 바이러스에 먼저 무너졌다. 정복자들의 총칼은 미지의 역병과 함께 아즈텍 인구를 12%까지 급감시켰다. 괴멸이었다.
치명적인 ‘감염’은 대개 익히 알던 세계에 미지의 세계가 섞여 들어오면서 일어난다. 이어서 접촉이라는 상호 관계를 통해서 사회 속으로 확산한다. 더 새로울수록, 더 이질적일수록 반응은 폭발적이다. 감염병이 다른 질병들과 전혀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는 이유다.
감염병이 번져나갈 때 두려움에 기반한 혐오와 배척의 정서가 함께 퍼져나가는 것은 공식에 가깝다. 좀비, 드라큘라를 비롯한 다수의 호러물도 이런 두려움에 기반해 탄생했다. 브램 스토커가 쓴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 백작이 사는 동유럽 트란실바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황량하고 후미진 곳”인데다 “세상의 미신이란 미신은 다 모여 있어서, 흡사 상상력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곳으로 그려진다. 드라큘라라는 ‘병원균’이 런던이라는 ‘합리적 세계’의 복판에서 혈액이라는 감염원을 통해 또 다른 이들을 흡혈귀로 감염시키는 것으로 묘사된 까닭이다. 이때 감염은 ‘오염’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이런 역사를 보면, 아직 정복되지 못한 감염병 코로나19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상하이나 베이징처럼 잘 알려진 도시가 아니라 우한에서 발병했다는 점, 발병원이 박쥐로 꼽힌다는 점은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더욱 낯선 이유다. 게다가 보건당국의 방역대책 아래 잘 통제돼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신천지’라는 낯선 개신교 소수 종파가 등장해 병이 급격히 확산하고 사망자가 여럿 발생했으니, 이 종파를 향한 혐오감과 적개심이 생기는 것까지도 납득할 만하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여전히 천연두라는 ‘괴질’을 앞에 두고 속수무책으로 괴멸되거나 질병을 흡혈귀에 견주며 타자화하는 전근대사회에 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코로나19 발생 이후 한국 사회는 우한, 중국인, 대구, 신천지 등을 대상으로 차례로 차별과 배제의 정서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며 공포를 외부로 밀어내고 있다. 특히 신천지의 경우 이 종교의 일부 교인들이 감염병 확산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고려해도, 종교집단 전체에 모든 책임을 지우는 공격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감염증 확산의 원인이 된 일부 환자들의 거짓말은 신천지 신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대중의 공포에 편승해 배제의 정서를 앞장서 조장하는 일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지자체장들의 공언처럼 신천지의 법인 허가 취소나 교인 명단 전체 압수가 코로나19 방역에 근본적인 도움이 되는 건지도 사실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오래전 피치 못할 이유로 신천지에 가입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이가 명단에 올라 있다면, 그는 비밀스러운 신앙의 전력이 공개되는 폭력을 겪게 된다. 실제로 지자체들이 신천지 교인 명단을 입수한 뒤 “이미 탈퇴했는데 보건소로부터 신천지 교인이냐는 연락을 받았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지자체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마사회의 불공정 운영을 고발하고 숨져 간 문중원 기수의 추모 천막마저 감염증 확산 우려를 명분으로 강제 철거한 일 역시 마찬가지다. 감염병 공포 앞에서 손쉽게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과 자유를 침범할 수 있는 사회는 견고한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코로나19 포비아’ 속 배제의 대상은 차례로 확대하고 있다. 그 대상이 다음번엔 내가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베트남에선 우리 국민이 현지 군사시설에 격리돼 공포에 떨고 있지 않은가. 보건당국과 의료진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황량하고 후미진 곳”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