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ㅣ 사회학자
“한 개의 단백질로 둘러싸인 나쁜 소식.” 196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피터 메더워가 바이러스를 묘사한 말이다. 세상이 나쁜 소식으로 가득하다. 코로나19 대처법을 둘러싸고 온갖 전문가와 아마추어들이 백화제방 중이다. 나쁘고 좋은 소식이 섞였다. 구별해야 한다.
일부 보수언론과 지식인들이 나쁜 소식을 들려준다. 정부의 시장 개입이라면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더니 정부가 마스크 공급 하나 해결 못 하느냐며 청개구리처럼 지청구를 해댄다. 급기야 무능한 정부는 제쳐놓고 ‘방역독립선언’을 하자는 말도 있나 보다. 보수에게 기대할 법한 책임감 있는 비판보다는 기회다 싶어 신이 난 선정적 포퓰리즘과 자아도취의 칼춤이 황망하다. 신종플루와 메르스 때 그이들의 수줍고 애매하던 수사들을 기억한다. 혹은 그 얌전하던 침묵도. 보수가 나쁜 건 아니다. 그 말이 한없이 가볍고 고약할 뿐.
개탄스러운 소식도 있다. 일부 현 정부 지지자들의 신천지와 대구·경북에 대한 태도다. 신천지의 행태와 방역 당국에 대한 비협조는 마땅히 비판할 일이다. ‘믿는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도 몸서리쳐진다. 하지만 그들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다. 일단 구속하고 처벌하라는 대중의 격앙에 맞장구칠 일이 아니다. 밝혀지는 만큼 처리하면 된다. 대구·경북도 마찬가지다. 감염의 진원지가 된 건 우연일 뿐 무슨 업보 탓일 리 없다. 무능한 지방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특권화된 수도권 외에 지방 정부들의 역량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발 ‘광주나 호남이 진원지였다면 그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주었을까?’라고 묻지는 말자. 상상력을 동원해서까지 증오를 합리화할 일인가? 슬프다.
전염병이 돌 때 희생양 만들기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인간 문명 자체가 짊어진 비극일지도 모른다. 희생양을 문명의 보편적 조건으로 본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은 중세 흑사병 시기에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유대인을 학살한 서사로 시작한다. 2002년, 콩고의 에볼라 바이러스 창궐 때는 한 마을의 교사 4명이 살해됐다. 에볼라의 원인이 마법이 아니라 바이러스라고 가르친 대가였다. 과학저술가 데이비드 콰먼의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가 전하는 일화다. 모두 나쁜 소식이다.
책은 희생양 찾기나 독립투사 코스프레보다는 성찰을 권한다. 인간 병원체의 60% 정도가 인수공통 감염병이며, 21세기 인류는 온갖 인수공통 감염병을 겪으리라고 경고한다. 보유숙주 속에서 장기균형을 이루던 바이러스들이 왜 뛰쳐나와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걸까? 이 행성의 마지막 큰 숲들과 야생 생태계를 침범해서 그들이 살던 곳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출한 탄소에 기후가 변화해 모기와 진드기가 서식지를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식 축산으로 가축이 바이러스의 진화와 폭발적 확산을 위한 증식숙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간 자신이 어떤 전염병보다도 급격히 개체수가 불어난 ‘대발생’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책은 “결국 우리에게 달렸다”며 끝을 맺는다. 나쁘되 소중한 소식이다.
너무 우울해지지는 말자. 재난이 닥치면 함께 협력하는 것도 우리의 본성이다. 그때에 우리는 모든 차별의 표지를 벗어던지고 놀라운 사회적 유대 속에서 재난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곤 한다. 슬픔에 기쁨이 겹치는 위대한 체험은 재난 이후에도 오래 기억된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까지 재난을 추적한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알려주는 좋은 소식이다. 우리도 5월의 광주에서, 기름 흐르던 태안에서 이미 경험한 것들이다.
바이러스의 절멸은 불가능하다. 이익을 탐해 자연을 파괴하고 치킨과 삼겹살을 못 끊는 우리 자신이 그 불가능의 이유 중 일부다. 우리가 나쁜 소식의 일부다. 그래도 우리 삶의 일부를 가다듬어 조금씩 좋은 소식을 전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이렇게. 이웃 몇몇이 직접 마스크를 만들었다. 필터를 넣고 뺄 수 있어서 재활용이 되는데다 편안하고 예뻐서 대박이 났다. 이곳저곳 노하우가 전파되고 있다. 또 만들어서 더 많이 나누겠다고 한다. 바이러스로 우울하던 동네에 활기와 웃음이 돈다. 작지만 좋은 소식이다. 정부와 시장과 언론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 서로 협력하고 우리 삶의 일부를 바꾸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결국 우리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