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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21세기 ‘데카메론’ / 김은형

등록 2020-04-05 15:04수정 2020-04-06 02:37

코로나19가 유행하며 관심을 모은 책이 역병인 흑사병을 소재로 한 <페스트>와 <데카메론>이다.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가 14세기 중반에 쓴 <데카메론>은 중세 말 기독교의 탐욕과 위선을 신랄하게 꼬집으면서 근대문학의 탄생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시대와 언어를 막론하고 ‘고전문학선집’에서 빠지지 않는 이 소설은 ‘고전’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노골적인 성적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덕분에 1970~80년대 청소년들은 중세 수도사와 귀부인 또는 수녀들과 정원사의 성적 유희를 읽으면서 성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도 했다.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창궐해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도시 피렌체에서 인적 드문 시골로 피신한 여성 7명과 남성 3명이 모여 열흘 동안 풀어놓는 100개의 이야기가 얼개다. 고립을 자처하며 불안과 권태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작중 화자들의 처지는 지금의 ‘사회적 거리두기’와 흡사하다.

불안을 이기기 위해 작은 즐거움을 나누고자 하는 의지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요즘은 소셜미디어가 위로와 공감의 통로가 된다. 좋은 예가 구글 확장 프로그램인 ‘넷플릭스 파티’다. 한국말로 “라면 먹고 갈래?” 정도의 친밀감 강한 데이트 신청을 뜻하는 “넷플릭스 보고 갈래?”(Netflix and chill)라는 관용구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 높은 넷플릭스의 프로그램 하나를 정해 각자 보면서 채팅창으로 함께 수다를 떨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서비스가 시작된 지 열흘 만에 전세계 600만명 넘는 사용자들이 이용 중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유명 미술작품 등을 유쾌하게 비튼 패러디 경쟁도 한창이다.

유명인들도 이 흐름에 동참하고 나섰다. 밴드 ‘콜드플레이’ 리더 크리스 마틴이 집에서 홀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전세계인들과 실시간으로 연결해 신청곡을 즉흥으로 부른 ‘집에서 함께’(#TogetherAtHome) 릴레이는 국내외 인기 가수들로 퍼져나갔다. 세계 곳곳의 공연이 취소된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각자 집에서 이어폰을 끼고 실시간으로 앙상블을 맞춰 공개했다. 고립되었지만 연결되어 작은 기쁨을 나누는 ‘21세기 데카메론’이 쓰이고 있는 중이다.

김은형 논설위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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