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ㅣ 소설가
가난이나 질병, 혹은 재난이나 전쟁 등의 이유로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을 보면 어떤 마음이 생기는가.
누군가는 그 고통을 피해 간 자신의 삶에 안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연민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다. 그런 고통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고통에 자신의 책임이 있는 것만 같아 충분히 괴로워하며 고통을 분담하기 위한 실천 방식을 찾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간혹, 그 고통을 자신의 감정이나 생애와 완전히 분리하여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그 고통은 자신과 무관하므로 이용해도 되고 즐길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병들고 우울증에 걸리고 죽음을 생각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 사람은 인격을 가진 온전한 사람이 아니므로, 도구이고 노예이므로,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사물과 다를 것 없기에.
폴란드 작가 어피니티 코나의 장편소설 <세상 끝 동물원>에는 아우슈비츠 화장장에서 일하는 병색 짙은 유대인 여성에게 독일인 의사가 “너는 동물이야, 맞지?”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 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동물임을 인정하게 하면서 사람을 동물로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하는 화법이다. 이 의사는 실존 인물인 요제프 멩겔레를 모델로 하는데, 멩겔레는 아리아인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독일 인구를 효과적으로 늘리기 위하여 유대인을 대상으로 온갖 잔인한 생체실험을 감행한, 일명 ‘죽음의 천사’로 불리던 나치친위대 소속의 내과 의사였다.
최근 우리 사회를 강타한 엔(n)번방 사건은 아무도 용서할 수 없는 역사적 죄인인 멩겔레 수준의 잔인함을 드러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노예라고 지정하며 그 인격과 존엄을 집단적으로 짓밟았기 때문이다. 나는 분노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분노했을 것이다. 특히나 ‘이 정도면 누구 하나 죽는 애 나와야 하는데 죽었다는 소리 못 들어’서 아쉽다는 식의 가해자들의 채팅 내용에는 잠시 현실을 잊을 만큼 분노했다.
그런데, 왜 이 분노의 끝은 무기력하기만 한 것일까.
그건, 엔번방 가해자들을 있게 한 이 사회를 우리가 함께 만들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거듭되는 디지털 성범죄를 그동안 제대로 검거하여 처벌하지 못한 것, 피해자가 믿고 신고할 만한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 것, 다른 사람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최우선에 두지 못한 것, 이 모든 것에 우리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삶을 롱숏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현재의 시간은 우리에게 할당된 삶의 일부인 동시에 먼 미래의 과거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엔번방 가해자들을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그런 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사법과 교육이 쇄신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또 다른 피해자들은 마음 놓고 전화 한통 걸 곳이 없어서 혼자 울 것이고 혼자 죽음을 타진해볼 것이다. 그저 이용당했을 뿐인데 그마저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며 평생 감시와 불안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월이다. 4월에는 타인의 고통을 더 생각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지 않던가. 봄인 줄 알았는데 돌연 그 바람의 끝이 차가워질 때, 우리는 수몰되는 순간의 극심한 추위와 공포를 떠올리며 함께 아파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피해자들을 보호하겠다는 집념으로만 엔번방의 모든 가해자를 처벌해주길, 모두가 그 처벌 과정을 지켜봐주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교육을 부디 실천해주길. 우리 저마다는 타인의 고통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잊지 말아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