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ㅣ 작가·인권기록활동가
‘사육곰’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세상에, 곰이라니. 곰이라면 피로회복제 광고에 나와 “피로야, 가라” 하고 외치던 그 곰밖에 몰랐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이게 다 고양이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고양이 카라와 함께 살게 되었다. 카라는 공격적인 고양이였다. 날렵한 몸으로 펄쩍 뛰어올라 내 팔과 다리를 물면 믿을 수 없이 아프고 무서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카라를 몰래 유기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고,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절박한 심정으로 ‘무는 고양이 교육법’을 찾아다녔다. 가장 믿을 만한 방법은 ‘타임아웃’이었다. 고양이가 물면 즉시 자리를 뜨고 고양이와 분리된 공간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물리는 즉시’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핸드폰을 챙길 정신도 없이 방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핸드폰 없이는 단 10분도 버티기 어려웠으므로 그 방엔 고양이에 관한 책을 늘 준비해두고 읽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방에 갇혀서 고양이의 언어를, 그러니까 그들이 기분 좋을 때, 싫을 때, 고통스러울 때 보이는 몸짓과 소리, 통증의 신호들을 공부했다. 그러니 그 방을 나올 때 조금씩 변한 것은 카라가 아니라 나였던 것이다. <고기로 태어나서>, <아무튼 비건> 같은 책도 그 방에서 읽었다. 내가 먹는 돼지와 내가 먹이는 고양이가 결코 다를 리 없다는 걸 머리로 연결했던 날, 나는 동물을 먹지 않고 살아보기로 다짐했다.
당연히 고기가 계속 먹고 싶었기 때문에 욕망을 누르기 위해 동물권에 대한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에 멱살을 잡혀 끌려갔다. 한 제약회사 실험실에 갇힌 원숭이의 얼굴을 보았던 날은 너무나 울고 싶었다. 쇠로 된 형틀에 목과 팔다리를 꽁꽁 묶인 작은 원숭이들이 일렬로 매달린 채 주욱 도열해 있었다. 작은 원숭이는 원숭이를 닮았던 세 살 때의 나의 조카와 너무 닮아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아기였던 내 조카의 얼굴을 떠올렸다. 공포에 질린 아기의 입속으로 방호복을 입은 남자들이 긴 호스를 욱여넣어 독성물질을 투입했고 그들은 피를 토하며 축 늘어졌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혐오스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고양이는 인간에 대한 보은으로 자신이 사냥한 새나 쥐를 데려다 놓곤 한다는데, 나의 고양이는 매일 내 앞에 동물원에 갇힌 오랑우탄, 수족관에 갇힌 범고래, 위 안에 플라스틱이 가득 찬 앨버트로스 같은 존재들을 데려와 나를 식겁하게 했다. 그러니 곰에 대한 청탁을 받았을 때 ‘아, 이번엔 곰이구나’ 했던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는 사육곰에 대한 영상을 열었고, 즉시 슬퍼지고 말았다. 쇠창살 사이로 곰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강원도의 한 사육곰 농가였고 27마리가 갇혀 있었다. 21세기의 지옥도는 그렇게 그려져야 할 것이다. 땅으로부터 1m 위에 지어진 ‘뜬장’, 절대로 부술 수 없는 쇠로 된 방, 그리고 그것들의 끝없는 도열. 그 안에서 가슴에 반달을 가진 곰들이 격투기 하듯 철창을 들이받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제페토의 시가 생각났다. 중국의 한 사육곰 농가에서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호스를 꽂아 수시로 쓸개즙을 뽑아냈다. 어느 날 쓸개즙을 채취당하던 새끼 곰의 절규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어미 곰이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해 철창을 부수고 탈출했다. 어미 곰은 새끼 곰의 사슬을 끊으려 했지만 실패하자 새끼 곰을 끌어안아 질식시킨 후 스스로 벽에 돌진해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한 온라인 뉴스 댓글 창에 제페토는 이런 시를 남겼다. “너의 가슴팍에/ 반달을 물려준 것이/ 이 어미의 죄다/ 숲에서 포획된 내 아버지 방심이 죄다/ 죽기 전 아버지는/ 산딸기를 그리워했다/ 농익은 다래를 그리워했다/ 이제 그만 고통을 끝낼 시간/ 아, 깊은 산 고목 틈에 출렁일/ 아까시 꿀”(<반달>)
카라는 선물처럼 찾아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고 나는 그에 대한 보은으로 탈육식을 선택했다. 죽인 동물을 먹지 않겠다는 선택은 죽어 있던 어떤 감각을 거짓말처럼 살아나게 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곰의 쓸개는 인간의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곰의 권리다. 곰에겐 땅을 밟으며 아까시 꿀을 취할 권리가 있고, 인간은 인간이 동물들에게 자행해온 21세기의 이 잔혹한 착취를 끝낼 의무가 있다. 마음이 아프다. 이제 그만 고통을 끝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