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필규 ㅣ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2016년 말 촛불집회에 아이와 함께 갔다. 아이의 말. “이런다고 뭐가 바뀌는 거야?” 동문서답을 했다. “다들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나온 거지.” 다행히 작은 뜻들이 한데 모여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두번째 맞이한 인권변호사 대통령, 새로운 희망을 봤다. 많은 인권 과제들은 ‘나중’으로 밀렸다.
총선이 끝났다.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장은 ‘코로나19와 경제 위축이라는 국난’ 극복을 얘기하며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들의 뜻도 헤아리겠다고 했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나라가 잘못 가는 것을 막지 못해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이제 대선이 700일밖에 안 남았다며 표를 바라보면서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이들은 스스로의 비겁하고 잔인했던 과거를 되돌아볼 줄 모르고 선악 이분법에 계속 빠져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정도 인권문제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와 법무부 인권국은 그러한 위치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꼭 필요했지만 서로 협력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다. 인권의 여러 흐름을 조율하고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청와대는 좀처럼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총선은 지나고 보자는 얘기들이 들려왔었다. 이제는 핑곗거리도 없어졌다. 부분적으로 발전하고 부분적으로 후퇴해온 어중간한 인권의 시점이다. 지난 정권들에서 한참 후퇴한 인권이 과거 제자리로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권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인권 정책과 조치들의 마련과 집행 전 과정을 투명하고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관련 인식과 조직구조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정권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그런 인권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인권(정책)기본법, 차별금지법 등의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권이 어디서든 후퇴할 수 있고 누구든 인권의 보호로부터 배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다. 차별과 혐오, 배제의 문제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님이 더욱 분명하게 다가온다. 불안전한 사회안전망, 특히 코로나19로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빈곤과 취약노동의 문제 역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임이 자명하다. 인권(정책)기본법 및 차별금지법 제정, 인권 정책의 비전 제시 등에 대한 정치적인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 부단한 소통과 실행의 동력이 필요하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6년째가 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부터 현재 미래통합당의 주요 인사들까지 모두 세월호와 관련된 자신들의 책임을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현재 정부 여러 부처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침몰의 원인, 수색과 구조 과정, 진실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 가족들은 고통받고 있는데 죄지은 이들이 당당하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등도 대동소이하다. 진상규명에 필요한 자료 등의 확보도 정부기관들의 소극적 태도로 난항을 겪고 있다. 총선 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메시지가 철저한 세월호 진상규명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제는 더 이상의 ‘나중’도 또 다른 ‘최선’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19가 왔다. 정부가 신속하고 투명한 접근을 취하고, 봉쇄를 하지 않는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덜 제한적인 조치를 도입하고, 결과적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게 하고 상황의 호전을 가져온 점은 분명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감염병 상황에서는 모두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차별과 혐오, 배제의 인식은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광범위하게 표출됐다. 사회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코로나19가 가져올 변화된 세상에 대한 진지한 인권적 성찰의 기회도 갖지 못했다. 관련 인권의 목록은 물론이고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인권침해 경우의 수를 찾아 나가는 과정도 필요하지만, 코로나19는 기존의 판단 기준, 사고 틀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새로운 상황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선거는 끝났다. 누구는 압승을, 누구는 참패를 얘기한다. 인권은 변하지 않았다. 미뤄두었던 ‘나중’은 왔고 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동안 잘 듣지 못했던 혹은 듣지 않았던 목소리들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