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가끔 일하다가 생각이 막혀버리거나 방전된 전자기기처럼 힘을 쓰지 못할 때, 혹은 세상이 무척 시끄러울 때면 경주 서백당이나 산청 산천재에 가곤 한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정리되고 배터리가 충전되고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떠지기 때문이다. 가서 하는 일이라곤 오래되어 반들거리는 마루나 기둥을 쓸어보거나 마당 한켠 매화나무 아래 혹은 마루에 앉아 덕천강을 바라보는 게 전부인데, 일어날 때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그 장소들은 나에게는 스승이며 마음의 주름을 부드럽게 만져서 펴주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하긴 예전에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여러가지로 나를 이끌어주던 스승이 몇분 계셨다.
1988년 5월15일, 스승의 날에 <한겨레> 창간호를 집에서 받아봤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글로 된 제호와 읽기 쉬운 가로쓰기 신문은 무척 신선했고, 입말의 느낌이 살아 있어 마치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같이 친근했다. 더군다나 1면 오른쪽 상단에 자리잡았던 한겨레 논단은 쉽게 읽히지만 묵직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 엉켜 있던 생각의 타래를 풀어주는 듯 시원했다. 리영희 교수, 조영래 변호사, 소설가 최일남 선생 등이 우리에게 건네는 여러가지 이야기는 마치 멀리 보이는 등댓불처럼 생각의 방향을 조정하게 해주었다.
특히 리영희 교수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자료나 정보를 통해 꽁꽁 감춰놓고 보여주지 않았던 진실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중 지금도 기억나는 이야기는 ‘백주의 평안도 도깨비 어덕서니'라는 칼럼이다. 어덕서니라는 도깨비는 있다고 생각하면 점점 커져서 하늘까지 닿고, 없다고 생각하면 차츰 줄어들어 땅속으로 꺼진다고 한다. 리영희 교수는 그 칼럼에서 당시 정부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수시로 꺼내서 국민들을 겁주는 북한의 위협을 일반에 공개되는 미국의 무기연감 등을 통해 허깨비임을 증명해 보인다. 그리고 “진실의 빛을 쐬면 어덕서니는 꺼져버린다”며 글을 닫았는데 그 문장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선거가 끝나면 세상이 좀 조용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있지도 않은 어덕서니를 만들고 자꾸 키워가고 있다. 모두가 큰 소리로 서로 옳다고 자기 말만 부르짖을 때, 사람들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지긋이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중재해주는 어른이 한분 있으면 좋겠다. 뭐가 그리 바쁜지 옆을 보지 못하게 가리개를 달고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앞으로만 치닫는 바람에 시야는 좁아지고 어덕서니는 하늘까지 닿도록 커지고 있다. 지혜라는 것이 별것인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진정으로 싸워야 할 대상을 가려내면 어덕서니는 꺼져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