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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사회서비스, 공공인프라를 강화할 때 / 양난주

등록 2020-04-27 18:10수정 2020-04-28 09:16

양난주 ㅣ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며칠 전 국세청이 부동산법인 전수 검증에 착수하면서 발표한 탈세 사례에 기가 막혔다. 한 병원장이 광고비 수십억원을 20대 초반인 자녀 명의 광고대행·부동산법인으로 지출했다는 거다. 매출 96%가 부모 병원에서 온 광고비였지만, 광고 실적은 없었고 법인이 산 강남의 20억원대 아파트에는 그 자녀가 산다고 했다. 병원 비용 빼돌리기와 세금 피하기에 새삼스럽게 분노가 치솟았던 건 이 기사 위로 코로나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하던 보건 의료인, 특히 간호사들의 얼굴이 겹쳐서다.

아마도 그 병원은 더 많은 환자가 찾도록 ‘광고’를 하면 병원 수익이 늘 거라며 예산을 책정했을 것이다. 다른 비용은 경영 효율화를 위해 삭감했을 수 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사와 간호사의 사명감은 수익만 앞세우는 경영 논리 앞에서 무력해졌을 수 있다. 어디 병원뿐이랴.

우리나라에서 보건의료, 교육, 보육, 요양 등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최일선 기관들은 대부분 민간기관이다. 정부는 시민들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그 비용 일부를 해당 기관에 지원해준다. 병원비와 약값을 지원하고 소득수준에 따라 등록금을 지원하고, 보육료와 요양 비용을 지원한다. 실제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의 고용은 전적으로 민간업체의 손에 맡겨져 있다.

똑같은 자격증으로 똑같은 일을 하지만, 업체에 따라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근무조건은 천차만별이다. 사회서비스 노동자는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직장을 옮기고, 이용자도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를 찾아야 하는 게 사회서비스 시장의 논리다. 누군가는 이 선택과 경쟁을 통해 서비스 질이 높아진다고 하지만, 이 시스템에서 사회서비스는 서비스를 파는 업체의 수익 창출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 무형의 사회서비스를 사고파는 시장에서 신뢰가 쌓이기는 쉽지 않고, 지역과 기관별 격차는 더 확대된다. 정부는 동일한 비용을 지원하지만 서비스 이용은 평등한 사회보장에서 점점 멀어진다.

우리나라 사회서비스에서 공공인프라 비중은 유독 낮다. 공공병원은 6%, 국공립 어린이집은 9%, 공공장기요양기관은 1%에 불과하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대기자에 이름을 올려야 국공립 어린이집 이용을 넘볼 수 있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직영하는 서울요양원 대기자는 1천명이 넘는다.

제도 도입 초기 정부는 재정 절감을 이유로 민간에 서비스를 맡겨버렸다. 그러나 정부가 절감했다는 비용은 결국 이용자에게 자부담으로 넘겨지거나 서비스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비용 지원 방식에서 정부가 공적 지원을 늘리면 수익을 좇는 민간기관도 확대되는 구조다. 그 결과 보건의료와 교육에 대한 공적 재원은 늘어도 가계 부담은 줄지 않고, 일선 간호사·보육교사·요양보호사의 일자리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보상도 낮다.

코로나19로 경험한 세계는 건강과 안전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한 개인의 건강과 안전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는 연결성을 체감하게 했다. 이쯤 되면 보건의료와 교육과 돌봄서비스에서 최선의 결과는 개인 선택을 보장하는 시장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다시 검토해보아야 한다. 모두가 자기만의 더 좋은 선택을 위해 경쟁하는 방식이 오히려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하는 비효율적 체계일 수 있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지역 간 인프라 격차와 기관 간 서비스 격차를 눈감고, 비용 지원만으로 정부의 사회보장 책임을 다했다고 하기엔 앞으로 다가올 위험이 너무나 크다.

보건의료와 교육, 보육, 요양과 같은 사회서비스가 우리 사회의 기초 안전망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재편이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나 자기가 사는 지역사회에서 가까운 병원과 학교, 어린이집, 유치원, 요양시설을 믿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신뢰할 만한 기관이 적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공립 기관을 확충해 질 낮은 서비스를 대체해야 한다. 민간기관들 가운데서 옥석을 가려 건강한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한다.

정부와 기관의 재정투자는 가장 일선의 인력이 더 안전하고 오래 일할 수 있는 고용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수익만을 우선시하는 사유화된 조직에서 인건비 절감에 내몰리며 일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동료들과 협력하며 지식과 기술 그리고 사명감을 키워나가는 조직에서 이용자를 존중하는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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