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패권국이나 신흥 강국이나 ‘패권 질서’를 운용할 역량과 의지가 없는 ‘킨들버거 함정’의 G0 시대이다. 한국의 실리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닫고, 고려처럼 능소능대하고 단호하게 국제관계를 설계할 때이다. 고려 시대의 G0와 한국의 G0는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19는 현재 국제질서의 위기가 ‘투키디데스의 함정’보다는 ‘킨들버거의 함정’임을 드러낸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흥 강국 아테네가 기존 패권국 스파르타와 충돌하며 빚어졌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위기는 이를 기록한 역사학자의 이름을 따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불린다. 미국과 중국의 충돌에 적용된 이 투키디데스 함정 이론은 코로나19로 도전받고 있다.
패권국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이후 자신의 ‘패권 질서’를 유지할 의지를 방기한데다, 코로나19로 역량마저 소진됐음을 보여준다. 신흥 강국이라는 중국 역시 미국을 대체할 실력이 부재함을 드러냈다. 찰스 킨들버거는 <대공황의 세계 1929-1939>에서 1차 대전 뒤 기존 패권국 영국이 자신의 패권 질서를 유지할 역량이 소진되는 상황에서 신흥 강국 미국은 이를 대체할 자각과 의지도 없어서 대공황이 나고 2차 대전으로 귀결됐다고 분석했다.
투키디데스와 킨들버거의 함정이 뒤죽박죽된 상황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할 의지와 역량도 없으면서 격돌로만 치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G0(제로)의 위기이다. 우리에게 어른거리는 G0 위기는 고려 시대를 소환한다.
고려가 건국됐던 서기 900년대는 당의 중화 체제가 붕괴되고, 중원에서 송과 거란(요), 금(여진)이 난립하던 패권 실종의 G0 시대였다. 송, 거란, 금이 새로운 패권 체제를 운용하거나 설계할 역량 혹은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격돌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중원의 패권을 노리던 송과 거란, 송과 금 사이에서 세력 균형추 구실을 했다. 강동6주로 상징되던 동아시아 무역 허브라는 실리는 그 몫이었다.
거란과 금은 중원으로 진출하려면 고려라는 배후가 안정될 필요가 있었고, 송은 거란을 견제하려면 고려가 절실하다는 점을 고려는 잘 알고 활용했다. 송의 입장에서는 고려와 연대해 요나 금을 제압한다는 ‘연려제요’(聯麗制遙), ‘연려제금’(聯麗制金)이고, 요나 금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안정화한 뒤 송을 정복한다는 ‘정려정송’(定麗征宋)이었다.
이를 활용한 고려는 서희의 강동6주 획득의 대가로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고 송과는 절교했다. 하지만 고려는 10년 만에 송과 거란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시작하는 등 거란과 송 사이에서 단교와 사대관계를 5차례나 맞바꾸어갔다. 송과 거란 사이에서 우왕좌왕한 것이 아니었다. 여진의 금이 건국된 뒤 송이 금과 연합해 요를 정벌하려 하자,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그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송-금 동맹으로 요가 붕괴된 뒤 금이 송을 침공해 황제까지 생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고려는 미련 없이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금과 사대관계를 맺었다. 고려는 금이 거란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당시 동아시아의 전략적, 경제적 요충인 보주성(의주)을 100년 만에 회복하는 실리를 취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보주성 회복은 고려가 200년 동안 송, 거란, 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취한 이유인 실리의 상징이다. 보주성을 전진기지로 하는 강동6주는 산둥반도-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해로의 길목이고, 여진·송·거란·고려 사이의 교역 중심지였다. 고려의 강동6주 획득은 동아시아 교역권 장악을 의미했다. 고려 때 대외무역이 성행한 것은 거란·여진 및 한족 간의 무역을 중개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동남아와 아라비아까지 무역을 확대한 배경이다.(박종기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고려가 금과는 항쟁을 하지 않고 사대관계를 유지한 것을 두고 조선 시대 이후부터는 오랑캐에게 굴종했다는 ‘자주와 사대’의 논리로 보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건국 이후 고려가 처한 다원적인 국제질서, 더 나아가 패권국가가 실종된 G0 시대를 감안하면, 고려가 수시로 바꿔온 사대관계는 실리에 입각한 등거리 외교로 봐야 한다. 고려가 이런 등거리 외교를 펼칠 수 있었던 내적인 논리는 강동6주로 상징되는 실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위기와 함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19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우리가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을 줬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화의 역류와 세계 공급망의 불안정은 한국의 산업 역량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극적으로 부상시키고 있다. 먼저, 한국의 실리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닫고, 고려처럼 능소능대하고 단호하게 국제관계를 설계할 때이다. 고려 시대의 G0와 한국의 G0는 크게 다르지 않다.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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