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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은퇴이민이라고 하지만 일본에선 연금이민이라는 말을 쓴다. 목돈을 들고 떠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연금만으로 외국에서 사는 일본 노인이 많기 때문이다. 주된 대상지는 필리핀·말레이시아·타이 등 동남아와 피지 등 태평양 섬이다. 매달 10만~20만엔(85만~170만원)이면 일본 안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버젓한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연금이민 증가는 중산층 붕괴와 맞물린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일본인의 비율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70% 이상이었으나 이제 50%를 겨우 넘는다. 연금이민도 애초 월 연금액이 25만엔 이상인 사람이 중심이었지만 이젠 그 이하 층까지 나라 밖으로 탈출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인구감소 시대에 들어섰다. 인구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899년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사망자가 출생자를 1만명 웃돌았다. 인구가 줄고 노인이 늘면 중산층 붕괴 속도도 더 빨라지기 쉽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가까운 미래이자 현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비율은 70~80년대에 부쩍 높아져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70%를 넘었다. 그런데 이제 일본 수순으로 떨어져 50% 안팎에 불과하다. 압축성장을 자랑했듯이 중산층 해체 과정도 압축적인 셈이다. 노령화 속도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총인구도 앞으로 10여년 동안 근소하게 늘어난 뒤 줄어들 전망이다.
중산층은 “안정된 경제 여건, 사회에서 선망되는 직업을 향유하며 그를 기반으로 최소한 자신들의 존재양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계층”이다.(<도시중산층의 생활문화>) 곧 일정한 물질적 기반과 정신적 능력을 갖추고 책임있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다. 시민층의 주력인 이들이 해체되는 것은 나라의 바탕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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