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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문화가 있는 계절’을 꿈꾸며 / 유선희

등록 2020-05-24 18:24수정 2020-05-28 15:10

유선희

문화팀장

“공연장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발열 체크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눠드린 문진표는 서울특별시의 ‘공연장 감염 예방 수칙’ 준수를 위한 것으로, 객석 입장 때 티켓과 함께 제출해주십시오.”

지난 주말, 대형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관람을 위해 찾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는 꼼꼼하고 철저한 방역이 이뤄지고 있었다. 입구에 깔린 방역 발판을 거쳐 발열 체크, 문진표 작성, 마스크 착용 확인 등을 하고서야 겨우 객석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 6일 코로나19 방역체계가 ‘생활 방역’으로 전환됐지만, 이태원 클럽발 확진자가 늘면서 공연계는 다시 초긴장 모드다. 더욱이 <오페라의 유령>은 지난 3월, 앙상블 배우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3주간 공연을 중단한 바 있다. 앞서 한차례 예매를 취소했기에 약간의 망설임과 걱정을 안고 공연장을 찾은 터였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기우였음은 이내 증명됐다. 이날 철저한 방역보다 놀라웠던 건 바로 관객들의 자발적인 협조였다. 시키지 않아도 모두가 탁자 위 소독제로 손을 소독했고, 사람이 몰리는 포토존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차례를 기다렸다. 객석에서 마스크를 벗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고, 인터미션에는 화장실에서 질서 있게 손을 씻었다. 관객들의 자세가 가장 빛난 건 화려한 무대가 끝난 뒤였다. 출연 배우들이 인사를 하는 커튼콜 타임, 객석을 가득 채운 건 ‘요란한 환호와 휘파람’이 아닌 ‘묵언의 기립 박수’였다. 마스크를 썼다 해도 옆 사람에게 끼칠 수 있는 불편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배려’였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할 수 있는 힘”(영국 <데일리메일>)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사실 장기화하는 코로나19 사태로 공연계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연예술 통합전산망을 보면 지난 4월 공연계 총매출은 47억1863만원으로, 2019년 4월 80억7151만원의 58% 수준에 그쳤다. 말 그대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문화가 없는 봄’을 보낸 셈이다. 이달 들어 국공립 공연장과 대형 작품을 중심으로 문화계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는 가운데 터진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재확산’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요즘 공연계를 시끄럽게 하는 ‘국공립-민간 공연 동일 규칙 적용 논란’ 역시 그런 의미에서 소모적일 뿐이다. 예를 들어 28~31일 세종문화회관 엠(M)씨어터에 오르는 자체 기획 음악극 <김덕수전>은 전체 600여석의 절반인 300석만 판매를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그재그 띄어 앉기’ 지침을 시행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다음달 11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개막하는 민간 제작 뮤지컬 <모차르트!>에도 띄어 앉기를 적용해야 할지를 두고 공연계는 설왕설래 중이다. 지난 8~10일 성남아트센터에 오를 예정이던 뮤지컬 <레베카>의 주관사는 “예매가 다 끝난 상황에서 갑자기 띄어 앉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공연을 취소한 뒤 성남시 등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바 있다. “공연장도 다수가 모인다는 점에선 클럽과 마찬가지기에 띄어 앉기는 당연하다”는 주장과 “막대한 제작비가 든 민간 공연에까지 손해를 감수하며 띄어 앉기를 강요하는 건 부당하다”는 주장이 맞선다. 공연별 특성을 고려한 세밀한 지침이 없어 벌어지는 불필요한 혼란과 갈등이다.

코로나19가 언제쯤 완전히 종식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병리학자들의 경고처럼 앞으로 더 고약한 바이러스가 유행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작정 극장도, 공연장도, 미술관도 가지 않고 ‘방콕’만 할 순 없다. 이젠 국가 방역시스템을 넘어선 생활 속 방역, 개인 차원의 방역이 필요한 때다. <오페라의 유령> 관객이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면,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현실에서도 문화가 공존하는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외국 언론이 감탄한 ‘케이(K)-방역’의 저력이 아닐까. 이제는 ‘문화가 있는 여름’을 꿈꾼다.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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