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김현영 ㅣ 여성학 연구자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는 생선을 경매하는 활선어 위판장을 개조하여 공연장 겸 식당으로 만든 ‘해녀의 부엌’이라는 곳이 있다. 총 100여분의 시간 동안 해녀의 삶을 담은 공연을 보고, 해녀가 직접 설명해주는 제주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 이야기를 듣고,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을 먹고, 해녀와의 질의응답 인터뷰로 마무리된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출신의 청년여성예술가 김하원과 고유나가 시작했고 종달리 어촌계와 해녀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제주 출신이기도 하고 가족들 중 해녀도 있는 김하원이 ‘해녀의 부엌’을 시작한 계기는 뿔소라였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나는 뿔소라의 80%는 일본에 수출된다. 소라의 껍데기에 별처럼 뿔이 돋아 있는 특이한 형태라 일본에서 도깨비방망이 같다고 하여 인기를 끌었는데, 한-일 관계가 경색되면서 수출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20년 전과 비교해서 가격이 점점 떨어지던 참이기도 하여 판로 확보를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전공을 살려 공연예술과 접목하여 지금과 같은 형태로 개발하게 되었다. 제주는 최근 십수년간 특히 비자림로 나무가 베어지고 강정해군기지가 들어서는 등 ‘개발’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다. 개발이란 단어가 나무를 자르고 산을 파헤치고 바다를 메우는 데가 아니라 문화예술콘텐츠에 붙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개발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 방법에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개발이 있다면 토지나 천연자원에 대한 개발이 아니라 지식과 재능을 발달시키는 지식문화역사콘텐츠의 영역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89살 종달리 최고령 해녀 권영희가 출연했다. 코로나로 인해 두달 만에 열린 터라 긴장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엄살이지 싶다. 정작 공연이 시작되자 그런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해녀는 바닷속에 들어가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치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눠지는데 권영희는 상군 중의 상군으로 한때 별명이 용왕 할머니의 손녀였다고 한다. 김하원이 이렇게 소개하자 권영희는 팔꿈치로 찌르면서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웃었다. 언제까지 물에 들어가실 거냐고 관객이 묻자 권영희는 89살이니까 올해까지만 들어갈 거라고 답했다. 김하원은 ‘해녀의 부엌’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바다 사정이 되면 물질을 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던 해녀들이 이제는 공연하는 걸 더 기다리시는 눈치라며, “이게 더 쏠쏠해서?”라고 농담을 던졌다. 권영희는 ‘응?’ 하는 표정으로 잠시 골똘해지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에이, 그건 아니다”라며 “사람들이 이렇게 와서 맛있게 먹고 즐거워해주는 게 기뻐서 그런 거”라고 답했다. 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했을 때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실감이 없었던 해녀들은 직접 채취한 해산물을 사람들에게 먹이고 자신들의 삶을 연극으로 만든 젊은 청년여성예술가들의 공연을 보고 해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는 이 모든 과정에서 비로소 해녀로서의 삶이 고생스럽기는 해도 꽤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나 이만하면 그래도 잘 살았제?’) 고생스러운 삶은 피해의 증거가 아니라 삶을 견뎌내온 이들에게 훈장 같은 기억이 되었다. 모든 순서의 마지막에 이루어진 해녀 인터뷰는 권영희의 노래로 마무리되었다. 현기영이 작사하고 재일조선인 출신 양방언이 작곡한 ‘해녀의 노래’로 첫 곡을 시작한 권영희는 앙코르곡으로 ‘독도는 우리 땅’을 불렀다. 작사가 박인호가 2012년 가사 일부를 수정하며 거리 단위와 주소지 등이 현재 시점에 맞게 바뀌었다고 한다. ‘독도는 우리 땅’은 방송국에서 금지곡이었는데 이유는 이제는 달라진 지리적 정보가 들어가 있어서였다. 그런데 거기 말고도 바뀐 부분이 있다. “오징어 꼴뚜기 대구 홍합 따개비 주민등록 최종덕 이장 김성도” 바로 이 부분, 독도지킴이의 이름이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권영희의 노래를 듣다가 지워진 가사가 무엇이었는지가 생각났고, 나는 그제야 권영희가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이유를 깨달았다. 바뀌기 전의 가사는 이랬다.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알 물새알 해녀대합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