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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허하다 / 김진해

등록 2020-05-31 17:59수정 2020-06-01 02:36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허’를 길게 늘여 읽을수록 그나마 쓸쓸함 한 자락을 담는다. 둘도 없이 사랑하던, 자기다웠던, 가장 충실하고 행복했던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 모든 감정이 떠나가 버린 다음에 오는 감정의 감정. 의미 있던 게 한순간 의미 없어지면서 밀려오는 감정. 마음뿐 아니라 존재 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 땅이 꺼져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 애초에 그릇이 없었더라면 채울 것도 없고 ‘부재’의 흉터도 남지 않았을 텐데, 미련은 끝이 없다.

그러니 보기 좋은 대상에 눈이 팔려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는 무관심한 ‘실하다’는 반대말이 될 수 없다. ‘허하다’는 자신의 마음 상태만 지목한다. ‘허한’ 마음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죽음이든 결별이든 부질없음이든 허함은 쌓이고 쌓인다. 그 퇴적물이 사람을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사람으로 만들지, 냉소적인 사람으로 만들지는 모른다.

이용수님, 윤미향님 두 사람 모두 허할 것이다. 같은 길을 걸어왔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알 때 느낄 막막함을 상상하기 어렵다. 진정한 철학이 기존 철학을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하듯, 모든 운동은 기존 운동을 비판하는 데에서 발전할 수 있다. 결점은 우리를 이루는 일부이다. 우리는 확신에 찬 사람들끼리 모인 돌무더기가 아니다. 인간의 삶이란 분명하지도 확고하게 정해져 있지도 않다. 다양한 목소리와 작은 다짐을 이어 붙인 조각보. 허하다고 실한 곳으로 튀는 게 아니라 그 허한 곳 한가운데, 텅 빈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 허한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낸다. 그래도 허하긴 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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