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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비대면에 대한 단상 / 노은주·임형남

등록 2020-06-02 16:40수정 2020-06-03 13:58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졸기’가 나온다. 졸기란 어떤 유명 인사가 사망했을 때, 사관들이 기록한 그 사람의 일생이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우암 송시열의 졸기였다. 처음에는 그의 인생에 관해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며 칭송하는 글로 시작되는데, 그다음에 바로 부정적인 면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 이어진다. 그 글은 한참 후에 다른 사관이 쓴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시각의 여러 평가들이 마치 신문기사에 댓글 달리듯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댓글 문화가 있었구나” 하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인터넷 시대의 댓글은 어떤 글에 대한 반응을 즉각적으로 살필 수 있고,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본질에서 벗어난 엉뚱한 말들과 날이 선 비방, 그리고 험악한 이야기가 오갈 때 사람들은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만약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쉽게 극단적인 표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접촉을 하지 않는(untact, 언택트) 공간에서는 얼굴을 모르는 상태로 만난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날 선 감정을 분출한다. 그것이 ‘비대면’의 폐해이고 익명의 공간이 가져오는 비극이다.

미국의 공군기지에서 무인폭격기를 조종하며 이라크전을 수행하던 ‘평범한’ 미군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아침에 여느 가장들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인사를 하고 출근하여 자리를 정돈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비행기를 조종한다. 그리고 목표지점을 찾아 공격한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분노도 어떤 사적인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늘 다니는 퇴근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저녁식사를 하고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특별할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어떤 직업인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중동의 어떤 국가, 어떤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가고, 그가 열심히 일을 할수록 바다 건너 머나먼 대륙에서는 큰 재앙이 벌어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실제 전장에서 폭격의 결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퇴근할 수 있었을까.

건축도 그렇다. 아파트나 관공서 같은 요즘의 현대건축에서 사람은 데이터이고 건축은 그저 매끈한 제품이다. 이를테면 비대면의 건축은 진작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건축이란 근본적으로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기에, 건축가는 그곳을 이용할 사람을 만나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공감해야 한다. 앞으로의 건축공간은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극복해야 할까. 비대면의 시대를 살아가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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