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웅재 ㅣ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지난달 말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이후, 미국 내 전역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시위 초반 140개 이상 도시에서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며 상점을 약탈하는 폭력 양상도 보이다, 평화시위를 촉구한 오바마 전 대통령과 플로이드 가족 등의 호소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플로이드는 죽기 전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고 호소했고 관련 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유되며 시민들의 분노를 키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 초기, 시위대를 폭력배로 지칭하며 주지사들에게 시위를 진압하지 못하면 얼간이라는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 그는 5월 일자리 반등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시위대 문제와 코로나 팬데믹에도 엄청난 진전을 이루었고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기라고 덧붙이며 “오늘은 플로이드에게 좋은 날”이라고도 했다. 인종차별 대책에 관한 질문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경제를 갖는 것이 나의 계획이라면서 경제회복을 흑인 불평등 대책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에게도 상당한 기시감을 주는 것일 듯하다. 코로나19 이후 도처에서 언택트와 뉴노멀 사회의 도래가 발화되지만 우리는 그 모습의 구체를 알 수 없고, 많은 이들은 이러한 변화가 삶과 일상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킬지 불안한 마음을 거두지 못한다. 또한 기술 진보를 둘러싼 다기한 전망과 약속들, 정치적 기표들, 가령 파괴적 혁신 등의 수사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지,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지 누구도 자신감 있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므로 경제회복이 플로이드 같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는 절박한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그저 그렇게 될 것이라 가정하거나 이를 경제성장을 통해 우회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적으로 별 저항 없이 수용되거나 재생산되는 가운데 또 다른 막연한 기대와 근거 없는 희망을 낳는 것이 아닐까.
미국의 형해화한 선거 제도와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대통령직의 수행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지성과 덕성은 물론, 시민적 윤리나 인간적 교양마저 결핍된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서구 민주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기성 정치에 대한 냉소를 기반으로 득세한 포퓰리즘은 그러한 지도자를 선택한 대중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경제적 위기와 불평등의 문제는 문화적 영역에서 연관된 징후를 드러내는데, 이는 국가마다 상이한 듯 보이면서 체제의 위기에 대응하려는 주체들의 전략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이것들은 한쪽에선 외국인과 성소수자 등 일상에서 접하는 타자에 대한 혐오의 문화정치로, 또 다른 한쪽에선 무한경쟁 사회를 견뎌내는 주체들의 소진과 불안의 징후 및 이에 대처하는 소비와 힐링 등 마음의 정치경제학으로 드러난다.
이는 과거 트럼프가 출연해 인기를 끌었던 리얼리티 프로그램(〈The Apprentice〉)의 대사였던 “넌 해고됐어”(You are fired)란 말을 상기시킨다. 이를 두고 미국에선 “우린 모두 해고됐어”(We are all fired)란 자조 섞인 유머가 회자되기도 했다. 이는 미국 대중의 힘겨운 일상을 풍자하는 농담이지만 일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화한 신자유주의의 그늘에서 만성화한 피로와 소진을 체험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추방된 모든 잉여적 주체들의 비애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미국의 시위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사회도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숨을 쉴 수 있는 사회를 가꾸어나갈 수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