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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조계종의 책임과 자격 / 박진

등록 2020-06-15 18:38수정 2020-06-16 09:44

박진 ㅣ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 조계종 나눔의집(이하 나눔의집)을 방문했다. 초여름 햇살이 뜨거운 날이었고, 방문자들이 한두명 보였지만 시설은 조용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세간의 관심에 비하면 처연하게 한가한 낮이었다.

‘나눔의집’ 관련한 연락을 처음 받은 것은 5월 초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거주시설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대책을 논의해 보자는 연락이었다. 지방에 내려가 있던 터라 올라가서 이야기하자며 약속을 미뤄두었다. 올라오던 그날, 버스 안에서 이용수 할머니의 첫 기자회견 보도를 보았다. 할머니는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모금한 성금이 피해자를 위해 쓰인 적이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시로서는 정의연 사정이야 모를 일이었지만 나눔의집에서 벌어진 일은 불법과 비리, 인권침해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일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국민 대다수가 정의연과 나눔의집이 전혀 다른 기관이라는 인식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도 없었다. 막막한 와중에 정의연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정의연은 주목받았지만 나눔의집은 정의연 쉼터쯤으로 사람들 머릿속에서 분리되지 않은 듯했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나눔의집은 조계종이 주도적인 구실을 하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불교인권위원회에서 만든 기관이다. 법적으로야 조계종과 무관하다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1992년 개원한 이래 현재까지 조계종 인사들이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법인 정관은 이사 3분의 2를 조계종 승적을 가진 자가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 스님은 전 상임이사였다. 현 대표이사인 월주 스님은 2009년부터 나눔의집에서 지역건강보험을 납입해주고 있으니, 깊은 연관을 가진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언론 보도 이후 줄기차게 불교방송에서 나눔의집은 조계종과 무관하다 주장하고 있으나 나눔의집 곳곳은 조계종 숨결이 묻어나는 불가의 향기로 뒤덮여 있다.

나눔의집이 기부금품 모집 등록 없이 모금을 하고, 상근하지 않은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한 불법은 이제 알려진 편이다. 모금 현황조차 투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인데, 현금 더미가 배임 혐의를 받고 있는 전 사무국장 책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할머니들 역사가 기록된 역사관을 둘러보았다.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시설 주인인 연로한 할머니들을 배려해 설계된 공간이 아니었다. 할머니들의 그림이 전시된 제2역사관에서 본 풍경도 충격적이었다. 유명한 고 강덕경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스크래치가 그어져 있었다. 시설 관리자는 일본 전시 중 우익 테러에 의한 상처라 주장하지만, 그와 유사한 사례의 테러와 비교할 때 크게 설득력 있는 대답이 아니다. 그림은 현재도 손상된 상태로 전시 중이다. “가을날, 경복궁 관람이 소원이라는 할머니 요구를 추운 날씨를 이유로 거부하던 관리자는 11월이 되자 3시간이 넘는 조계종 야외 행사, 원행 스님 취임 법회에 할머니 3명을 모두 참석시켰다”는 직원 진술이 있다. 궁금했다. 자신들을 내세워 후원을 받는 이곳에서 할머니들은 주인이었을까? 역사관 출구에는 후원자들 명패가 천장에 이를 만큼 빼곡했다. 아마도 자신들 후원이 할머니들을 위해 쓰일 것이라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 방탄소년단(BTS)도 보이고 유재석씨 이름도 보였다.

나눔의집 법인 정관에는 할머니들을 위한 사업 내용이 없다. 정관대로라면 언제든지 일반 노인요양시설로 운영될 수 있다. 정관 목적에도 “조계종이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사회복지사업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고만 쓰여 있다. 현재 나눔의집에는 이옥선 할머니 등 다섯분이 계신다. 92세에서 104세까지 연로한 분들이시다. 할머니들의 삶과 기록이 소중하게 존중받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적어도 정의연에 쏟아진 공권력과 언론의 관심 10분의 1만 나눔의집과 조계종에 향해도 좋겠다. 언론 보도 이후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진위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던 조계종은 아무런 후속조치도 없이 시간만 끌며, ‘조계종과 무관’만을 주장하고 있다. 할머니 다섯분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분명한 것은 조계종에 책임이 없다면,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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