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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묻기'에서 ‘듣기’가 되었더라면 / 권김현영

등록 2020-06-16 17:22수정 2020-06-17 11:50

권김현영 ㅣ 여성학 연구자

이용수님은 정의기억연대(옛 정대협)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수요 시위를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금한 돈의 사용처를 밝히라고 했으며, 자신은 성노예가 아니라고 말했다. 회계 부정과 비리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운동 방식과 내용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보수 언론은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취재 경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미공개된 피해자 쉼터의 대문과 마당이 공개되었다. 근처에 사는 주민이라면 그 사진만 보고 그곳이 어딘지 즉시 알았을 것이다. 피해자 쉼터의 위치가 노출되다니, 걱정과 분노가 교차했다.

얼마 전 서울역 폭행 사건의 피의자조차도 “비록 범죄 혐의자라 할지라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주거의 평온을 보호받음에 있어 예외를 둘 수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는데, 하물며 피해자의 쉼터 주거권을 위협하는 행동을 수사기관이 앞장서고 언론이 부풀리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성폭력·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쉼터는 거주자의 심신 안정이 최우선이다. 인근 주민들에게 알려지면 생활인으로서의 삶이 고단해지고 위험에 노출된다. 가해자가 찾아오거나 주민들이 혐오시설로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조계종이 운영하는 ‘나눔의 집’ 위치는 애초에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져도 되는 것이었을까? 한번 시작된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우리 사회에는 어떤 방식의 지원이 피해자의 일상 회복에 더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있다. 수사 과정에서 피해 증언을 반복하는 것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정신 건강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성인 피해자의 경우에도 정도가 다를 뿐 다르지 않다. 피해자는 사건과 무관한 질문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것들은 반성폭력운동을 통해 만들어온 소중한 지식이다. 그런데 왜 이 지식이, 일본군 위안부 운동 방식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일까.

피해자들이 함께 오랫동안 모여 살아가는 것은 괜찮은 일이었을까. 피해자들은 가능한 한 쉼터에 장기간 입소하지 않으려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집단상담 프로그램이나 자조 모임은 상호 지지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되기도 하지만, 트라우마가 강화될 때도 있다. 공동생활이 맞지 않는 개인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쉼터에 장기 거주한다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애초에 감당하기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까(그런 점에서 그 시간을 함께했던 손영미 소장님의 수고와 마음에 감사를 드리며,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고민은 이어졌다. 피해 증언을 반복하게 하는 운동 방식이 내상이 되지는 않았을까. 일본군 위안부 증언 4집 기록팀은 피해자를 타자화한다는 그동안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묻기’에서 ‘듣기’로 전환하겠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미리 플롯을 세워놓고 증언을 듣는 것이 아니라, 증언 속에서 플롯을 세우는 방식, 피해자의 기억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를 살피면서 증언 자체를 물신화하지도 타자화하지도 않는 방식을 고민해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왜 다시 피해자의 증언을 물신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적 고민으로 전수되지 못했던 것일까.

또한 전시 성노예 제도를 운용한 일본에 대한 비판이 피해자에게 더 상처를 입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했을까. 왜 이용수님은 ‘그래 난 성노예다. 그래서?’라고 되받아치기보다는, 그간 운동가로서 해온 30년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더럽혀진 나 때문에 여러분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나는 이보다 더 비극적인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이용수님을 공격하는 소위 진보진영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댓글을 보고 있으면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을 겪은 피해자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2018년에야 성폭력 피해자들이 공개적이고 집단적으로 말하는 미투 운동이 가능했는데 어째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1990년대부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미투 운동의 원조라고 추켜세울 것이 아니라 운동 방식이 갱신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피해 그 자체로 정의되는 삶을 원하는 피해자를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어째서 예외적인 영웅적 존재라고만 생각하고 말았던 것일까. 이용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졌다. 이제라도 묻기에서 듣기로, ‘공감적 청중’의 공동체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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