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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대법관 선정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 류영재

등록 2020-06-21 16:11수정 2020-06-22 02:36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법관은 왜 선출하지 않을까요. 약 5년 전 대법원장이 판사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눈치 없던 나는 손들고 대답했다. "법관은 소수자를 보호할 책무를 갖기 때문에 다수의 의사에 따라 선출되는 것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대법원장은 내 대답에 이어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헌법이 법관의 소수자 보호 책무를 중요하게 고려하여 법관을 선출직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법관에게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법관을 다수의 의사에 따라 선출하지 않는 이유가 다수의 의사를 견제하여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과연 우리 사법이 실제로 소수자 보호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왔는가.

미국의 행정부는 성소수자의 인권 보장 영역을 꾸준히 축소하려고 했다. 최근에는 건강보험 관련법에 포함된 차별금지 규정 중 ‘성’(sex)의 개념을 ‘남성 또는 여성, 즉 생물학적 성별’로만 해석하고 ‘성 정체성’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를 경우 보건 분야에서 남녀로 분류되지 않는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가능해질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선 민권법 중 ‘성을 이유로 한 차별(Discrimination based on sex) 금지’에는 ‘성 정체성(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해석 아래 직장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보건 분야에서의 차별금지 조항을 해석할 때 성 정체성을 배제하겠다고 발표했으니, 성소수자들의 걱정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미 연방대법원은 이러한 흐름을 끊는 판결을 내렸다. 연방대법원은 민권법 중 ‘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에는 ‘성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가 포함된다고 판시했다. 이제부터 미국에서 사업자가 직원을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할 경우에는 민권법 위반이 됨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민권법과 유사한 건강보험 관련법상 차별금지 조항에 ‘성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행정부의 해석과 대비된다. 다수가 행하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사법부가 걷어냈다. 이 국면에서 미 연방대법원은 다수의 의사를 견제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해내는 역할을 ‘실제로’ 해낸 것이다.

주목할 점은 소위 ‘보수적’이라고 불리던 현재의 미 연방대법원에서 9명의 대법관 중 6명이 이 판결에 찬성하였다는 점이다. 이른바 ‘6 대 3 판결’이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인권 앞에선 보수도 진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미 연방대법원 같은 실천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최근 대법원은 소수자 인권 보장의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판결들을 쏟아내며 사법을 이끌고 있다. 하급심을 맡은 판사의 입장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대법원 결정은 단연코 ‘아동의 출생등록 될 권리’를 발견해낸 결정이다. 기존에는 부가 모의 협조를 받지 않는 한 사실상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도록 만든 법 때문에 연간 2만여명의 아이들이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법원이 위 법의 해석을 넓혔다. 그 결과 모의 협조를 객관적으로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는 부가 단독으로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법 규정의 문언에만 비추어 보면 과감한 판단이지만, 법관의 법 해석이 헌법상 보장되는 ‘아동의 출생등록 될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의 일침은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위 결정을 이끌어낸 대법관이 소위 ‘보수’로 분류되었던 권순일 대법관이다. 소수자 인권 보장 앞에선 진보도 보수도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그가 퇴임한다.

대법원이 계속하여 헌법상 소수자 보호 책무를 충실히 수행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대법관 선정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간 대법관 선정 절차가 진행될 때마다 항상 들려왔던 대법관 후보자들에 대한 이념 프레임이나 학벌 및 스펙 얘기를 이번에는 듣고 싶지 않다. 대신 사법철학과 삶의 궤적을 듣고 싶다. 누가 헌법에서 아동의 출생등록 될 권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는 절차라면, 의미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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