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본다면, 북한의 지난 30년 대외관계사는 그야말로 ‘배신을 당해온 역사’로 충분히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주변 강국들 중에서 상대적 약자인 북한을 상대로 해서 신의를 지킨 나라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 이 상황을 기억해야 오늘날 북한의 신경질적이고 과도한 반응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가 다시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폭파 등 북한의 일련의 돌발행동은 상궤를 벗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유엔 대북제재 등 많은 한계 속에서도 그래도 나름대로 남북 평화를 위해 일해온 남한 정치인에 대한 북한의 원색적 비난도 결코 생산적 대화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청와대의 표현대로 이 행위는 ‘몰상식하다’ 해도, 우리가 계속 대화를 하자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래야 상대방을 안으로부터 이해해 결국 공감대라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북한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본다면, 북한의 지난 30년 대외관계사는 그야말로 ‘배신을 당해온 역사’로 충분히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주변 강국들 중에서 상대적 약자인 북한을 상대로 해서 신의를 지킨 나라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 이 상황을 기억해야 오늘날 북한의 신경질적이고 과도한 반응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배신의 시작은 소련의 1990년 대남 수교였다. 그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1986년 김일성 주석과 만나는 자리에서 대남 수교는 없을 것이라고 확약했다. 그 뒤로도 소련 지도부의 요인들이 수차례에 걸쳐 대남 수교를 하지 않겠다거나, 해야 할 경우 적어도 동맹국인 북한과 사전 조율하여 대남 수교를 미국의 대북 수교를 전제로 하는 교차승인 방식으로 하겠다고 북한 지도부에 약속했다. 그러나 그 모든 약속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노태우 정권의 ‘경제협력’, 즉 차관 공급 제안과 대북 봉쇄 정책을 추진해온 미국의 의도에 그대로 넘어간 고르바초프 지도부는, 1990년 여름쯤에 대북 관계와 무관하게 남한과 수교하기로 결정했다. 1990년 9월, 소련의 외무부 장관이 이 소식을 평양에 전달했을 때 북한 지도부의 반응은 격렬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소련과의 동맹이 유명무실해졌으니 핵 보유국인 미국을 혼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독자의 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경고까지 들어야 했다. 지금까지 한반도를 괴롭혀온 북핵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1994년, 한반도를 전쟁 직전으로까지 몰고 간 제1차 핵 위기 이후 북-미는 10월에 제네바 합의를 맺었다. 북핵 개발 중단의 대가로 미국은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 그리고 경수로 발전소 건설과 중유 공급을 약속했다. 하지만 김일성에게 동맹 관계 유지를 계속 약속하면서 이와 동시에 노태우 행정부와 지속적으로 물밑 접촉을 해온 고르바초프처럼 미국도 그 어떤 대북 약속도 이행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소련이 이미 붕괴되고 김일성이 이미 사망했으니 북한의 붕괴도 시간의 문제라고, 당시 미국 관료와 전문가들 대부분은 철석같이 믿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북한이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북한붕괴설의 허구성은 결국 밝혀졌지만, 클린턴 지도부는 대북 관계 정상화에 대한 관심도가 저조했으며 그 뒤를 이은 부시는 아예 처음부터 대북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관계 정상화도 평화협정도 경수로 발전소 건설도 이루어지지 않아 2003년에 이르러 합의는 파기됐다.
소련에 배신당하고 미국의 적대와 홀대에 시달려온 북한의 또 하나의 기대는 대일 수교였다. 이미 1990년에 방북하여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자민당 실력자 가네마루 신 부총재와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부위원장은 원칙적으로 북-일 수교에 합의했다. 하지만 그 뒤에 미국이 비공식적으로 ‘비토’를 놓아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 말, 한국에서 햇볕정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북-일 수교 교섭도 새로운 탄력을 받았다. 결국 2002년 9월17일 평양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선언에 서명해 관계 정상화의 뜻을 천명했다. 대일 우호를 다지자는 의미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등 국가 차원의 일종의 ‘자아비판’을 이례적으로 행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국가의 과오를 잘 인정하지 않는 북한 외교의 역사상 사실 전대미문의 파격으로, 대일 수교에 북한이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데 북한은 여기에서도 바로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납치 문제’는 순식간에 일본 극우 미디어와 정객들의 인기몰이 수단이 되어 북한에 대한 전례 없는 악마화가 이루어지고 수교 교섭은 지금까지 한발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소련의 지원이 끊기고 대미 무역이 여전히 불가능하고 대일 관계도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의 경제적 생명줄이 된 것은 중국과의 교역이었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그 액수가 비교적 미미한 대북 교역보다 자국의 경제발전에 훨씬 더 큰 몫을 차지하는 대미 관계가 최근까지는 늘 우선순위였다. 북핵은 결국 북한이 처한 극한 상황의 결과라는 사실을 중국 쪽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중-미 갈등이 본격화된 최근까지는 대개 미국의 대북 압박에 같이 가세하곤 했다. 일부 연구자에 따르면 2003~2009년의 6자회담 때도 러시아 쪽보다 오히려 중국 쪽이 북핵 동결에 대한 미·일·한의 경제적 보상 등 북한의 요구 사항들을 의제에 올려 관철시키는 데에 훨씬 더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2016년에 중국이 미국과 함께 대북제재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통과시키고 나서는 북-중 관계는 2017년에 이르러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 뒤로는 중-미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중국은 군사동맹국으로서의 북한의 ‘이용가치’를 재발견해 관계 개선에 나섰지만, 두 나라 사이의 실질적인 신뢰 수준은 매우 저조하다.
이처럼 주변 열강과의 관계가 지난 30년 동안 고난의 연속이었던 북한은 그나마 동족국가 남한과의 관계에서의 돌파구 마련에 늘 관심이 컸다. 한데 주변 4강에 비해 과연 북한에 임하는 남한의 태도는 그렇게까지 신의가 두터웠던가? 박근혜 적폐 정권이 2016년에 개성공단을 폐쇄시킨 것은 북한에도 자국 기업에도 큰 손실을 입힌 실책이라는 점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데, 지난 4년 동안 과연 공단의 재개를 위해 한국 정부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는가? 북한 매체의 거친 표현들은 눈에 거슬리지만 한국 정부의 실천 부족을 탓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30년 동안 4강의 괄시와 배신에 시달려온데다 적폐 정권의 햇볕정책 포기, 이번 정권의 실천력 부족 등으로 트라우마를 겪어온 북한의 입장을 역지사지로 이해하여 국면 전환과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 평화만한 절대적 가치는 우리에게 없고 역지사지의 자세야말로 평화 만들기의 출발점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