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미 ㅣ 미국 노인권익연구단체 에이지 웨이브(Age Wave) 연구원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참사와 다시 점화된 인종갈등으로 미국 정부의 기본 정책을 사람 중심의 복지정책으로 새롭게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이 미국 전역에서 일고 있다.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의 니라 탠든 센터장은 “변화를 촉구하는 여론의 요구는 많은 지식인들이 생각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새로운 개혁을 야심 차게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뉴욕 타임스> 보도처럼 코로나 방역 실패와 계속되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로 미국의 정서가 진보적 성향으로 기울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사회주의적 성격의 정책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시사평론가들은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1960년대 세사르 차베스(Cesar Chavez)가 미국 서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이끈 남미계 농작민들의 권익신장 운동과 마틴 루서 킹이 주도한 탈빈곤 운동에 견줄 만한 전국적인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라 내다본다. 이 움직임의 결정적인 기폭제는 코로나19로 사망한 충격적인 숫자의 양로원 노인들이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양로원들의 부실함과 정부기관들의 관리 감독 실패가 세계 최대치의 노인사망률을 낳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 전체 코로나19 사망자의 80%인 8만7211명이 65살 이상 노인이다.
국민건강보험제가 없어 의료 혜택을 아예 못 받거나 비싼 의료비를 치러야 하는 보험체계가 가장 큰 개혁의 대상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여 적잖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코로나19에 감염된 뒤 기적적으로 회복한 시애틀의 마이클 플로(70)씨는 액면가로 총 112.2만달러(약 13.6억원)가 넘는 의료비 청구를 받았다. 뉴욕 주민 재닛 멘데즈(33)씨는 어머니의 치료비로 총 40여만달러(약 4.9억원)를 내야 한다. 전국민이 의료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특별위원회의 제임스 클라이번 위원장은 무엇보다 노약자 보호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인학자들은 많은 노인들의 희생은 이미 예견되었던 결과라고 말한다. 양로원의 비좁은 실내 공간, 부족한 인력, 낮은 예산과 임금. 거기에 노인을 차별하는 인식까지 더하여 노인들을 신속하게 구해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부족한 정부 지원과 늑장 대처의 기저에는 노인차별적 인식이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일례로 텍사스 부지사가 경제회복과 차세대를 위해 노인들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
버지니아주립대 노인학과 트레이스 젠드론 교수는 “코로나19를 통해 노인차별 인식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나누는 것은 노인과 젊은이의 간극을 넓히는 원인이다. 젊은이들이 노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장차 노인이 될 본인의 자존감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이다. 또한 자신의 노후를 노인차별의 암담한 사회로 만들어가는 근시안적인 어리석음이다”라고 말한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달리 한국은 코로나19 방역 모범국으로 선진국다운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한국의 노인 자살률과 빈곤율은 아직도 1위이다. 철저한 진단과 추적 등의 정책으로 코로나 확산을 억제한 것처럼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노인과 취약계층의 사회안전망 구축과 복지를 위한 과감한 정책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미국의 실패가 그러한 정책의 당위성을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