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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왜냐면] ‘조영남’ 대작 판결과 인적자본 / 이상준

등록 2020-07-06 18:00수정 2020-07-07 12:59

이상준 ㅣ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

내가 속한 연구원은 우리나라 국민의 인적자원 개발과 인적자본 역할을 연구하는 국가 정책기관이다. 설립된 1997년 당시만 해도 인적자본 투자, 인적자원 개발은 경영학, 경제학 교과서에나 있었지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못하던 시절이다. 이 당시 한 선임연구자가 필자에게 인적자본의 예를 들어준 것이 바로 피카소의 자화상 사례이다. 파리의 한 카페에 앉아 있던 피카소를 알아본 한 여인이 자신을 그려주면 그림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러주겠다고 하자 피카소는 단 몇 분 만에 그림을 주면서 50만프랑이라는 높은 금액을 요구하였다. 이에 여인이 너무 비싸다고 항의하자 피카소는 “당신을 그리기 위해 나는 40년이 걸렸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이다.

인적자본 축적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학력, 학위이다. 그러나 학력 외에도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성과와 업적을 남기는 경우도 인적자본 축적으로 볼 수 있고 그 분야의 전문성을 학계와 대중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또한 인적자본은 개인의 교육과 훈련 없이도 천재성에 의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인적자본의 축적이 꼭 시간에 비례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인적자본은 개인의 생애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축적될 수도 있다. 다만 개인의 생애 스토리에 기반한 인적자본 축적은 개인의 명성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오염되었을 경우 순식간에 100% 감가상각될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인적자본은 고유의 투자영역(domain)이 존재한다. 투자영역은 일종의 직업인데 통상적으로 현재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할 때는 새로운 인적자본을 축적해야 하지만 예외적인 영역도 있다. 예를 들면 해커라는 비윤리적 공간에서 활동하던 기술자가 정보보안이라는 긍정적 영역으로 순식간 시공간 이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인적자본영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는데 자본의 힘이 특정인의 유명세에 가세할 경우 그렇다. 오늘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 상당한 인기를 끌던 무한도전의 음원 도전 사례이다. 이 당시 음악계는 평생을 음원 발표에 공들여오던 음반제작사와 가수, 신인가수 등의 음원시장 진입을 방해하고 특히 개인의 인기를 앞세워 음원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음악 실력―정확히는 가수로서의 인적자본 축적―이 모자란 인기 개그맨들이 자신이 원하는 음악 형태를 전문 작곡자에게 의뢰해 자신이 평생 축적해온 개그맨이라는 인적자본과 방송자본의 힘을 이용하여 새로운 투자수익을 창출한 것이다.

최근 조영남 대작(代作) 사건 또한 유사한 것으로 미술에 대한 개인의 개념을 대리인을 통해 실현한 것을 대작으로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범죄로 성립하는지 여부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얼마 전 종결된 대법원 판결에서는 무죄로 결론이 났는데 이는 대작이 과연 범죄인지 아닌지 그 대작이 개인의 작품이라고 인정할지 안 할지에 대한 판단을 내린 것일 뿐 그 개념을 정의한 사람을 미술 영역의 충분한 인적자본을 갖춘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한 것은 아니다. 앞서 제시한 사례에서도 피카소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초상화를 더 잘 그려줄 수는 있지만 피카소이기 때문에 부탁을 한 것이다. 개념도 결국 누가 정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필자처럼 사회적으로 인적자본 축적이 적은 사람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대작 작가를 찾아갈지언정 문전박대당했을 것이며 설사 작품으로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미술 시장에서 판매 자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개념미술도 결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 정도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인적자본이 축적된 자만이 가능하다. 아이디어만 있다고 아무나 앤디 워홀과 뒤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영남의 ‘화투’ 아이디어의 실행 과정도 결국 한 생애에 걸친 가수로서의 인적자본 축적이 미술 시장에서 인정되기에 대작도 가능하였듯이 말이다.

이번 판결로 조영남 개인에게는 또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추가되었다. 이후 본인의 작품이 미술 시장에서 잘 팔린다면 대중에게 미술 작가로 인식되는 계기가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미술계에서 미술가로 지위부여가 당장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적자본 영역이 바뀌어 새로운 영역에서 인정받는 것은 국가가 공인한 자격과 학위 방식이 아닌 이상 그 사람의 생애 전반에 대한 업적과 공로, 그리고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스토리가 함께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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