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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피해자의 고통과 미래를 먼저

등록 2020-07-12 17:57수정 2020-07-13 13:55

조해진 ㅣ 소설가

한야 야나기하라의 장편소설 <리틀 라이프>의 주인공 ‘주드’는 젊고 잘생긴데다 인정받는 변호사로 겉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혼자 남겨질 때면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인물이다. 그 벌은 바로 자해이다. 주드는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어 수도원에서 자라는 동안 수도사에게서 성착취를 당했고 구조된 뒤에도 폭행을 포함한 성착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복지사와 대학 때 사귄 친구들의 애틋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또한 자신을 깊이 아껴주는 윌럼과 연인이 되면서 잠시나마 치유받기도 하지만, 그는 늘 ‘너무 가늘고 가볍고 실체가 없어서 공기마저 대체하지 않을 것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주드는 친구이자 연인의 죽음 이후 스스로 생을 놓아버린다. 그는 결국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리틀 라이프>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성착취가 그 사람에게서 어떻게 희망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가차 없이 제거해가는지를 담은 섬세한 보고서 같은 소설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아동 성착취 사이트를 만든 사람은 손정우, 한국인이었다. 손정우는 국제적인 공조수사로 체포되긴 했지만, 아시다시피 나이가 어리고 반성하고 있으며 결혼했다는 것이 참작되어 1심에서는 집행유예를, 2심에서는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불합리는 또 있었다. 돈을 내거나 아동 성착취물을 제공해야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 사이트 이용자 중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한국인은 한명도 없었다는 것…. 검찰에 송치된 217명 중에 단 43명만이 법정에 섰지만 대부분 벌금형에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최근, 법원이 손정우에 대한 미국의 송환 요청에 기각을 결정하면서 손정우는 출소하게 됐다. 재판에서 손정우는 변호사들을 대거 선임했는데, 그 선임비는 그가 아동 성착취물을 공유하고 팔아서 얻은 수익 중 일부일 것이다.

손정우가 개설한 사이트를 통해 수많은 ‘주드’들이 영문도 모른 채 성착취를 당했고 심지어 그 영상이 유포되기까지 했는데, 손정우와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은 전무하거나 미약했다. 그 ‘주드’들이 어떤 미래를 살아갈지, 어느 정도의 고통으로 몸부림칠지 1심과 2심, 그리고 범죄인 인도청구를 심사한 판사들은 인간적인 고민을 해보긴 한 것일까. 재판 과정을 지켜본 우리로서는 판사들이 성착취 경험으로 미래마저 박탈당한 ‘주드’들보다 가해자의 형편과 그가 선임한 유능한 변호사들의 수사에 더 깊이 공감했다고밖에는 판단할 수가 없다.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기각된 날, 내 친구 중 한 명은 이 나라에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미 아이를 낳은 또 다른 친구는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다고 밝힌 지인도 있었다.

영화 <한공주>(이수진 감독)에서 ‘공주’는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가해자들을 피해 전학을 가야 했다. 새 학교에서 가까스로 친구들을 사귀고 좋아하던 기타도 다시 치기 시작했지만 가해자들의 부모가 찾아와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공주의 과거가 밝혀지게 되고, 공주는 다시 혼자 남겨진다. 공주는 잘못한 게 없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없는 공주만이 죽음을 생각하고 실행한다. 영화 속에서 공주의 미래는 결국 지워진다, 물거품과 함께…. 현실의 ‘공주’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칼럼을 준비하고 쓰는 동안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보가 전해졌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의 고통을 입증할 수도 없는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에 대한 동의가 아닐까. 피해자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미래를 지켜주는 것이 공동체의 임무일 테니까, 그 임무를 이행하는 것이 곧 그 나라의 희망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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