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방향과 계획을 제시하고 이해관계의 조정을 시도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전체적인 그림에 대한 토론은 간데없고 특정 공기업의 사례만을 놓고 상대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초라한 논란만 존재하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금태섭
김용태 ㅣ 정치인
금태섭 전 의원님, 편지 잘 받았습니다. 선거 전후로 마음고생 심하셨을 텐데 어느 정도 추슬러졌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우여곡절 끝에 세 번 연거푸 당선되었던 지역을 떠나 다른 곳에 출마했고 선거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첫 직장 이후 26년 만에 출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뜬금없어 보이겠지만 저는 요즘 이종격투기를 간혹 봅니다. 그게 뭐가 좋냐는 아내의 핀잔이 쏟아지지만 티브이 속으로 들어갈 듯이 경기를 지켜봅니다. 정글 같은 격투장에서 사활이 걸린 듯 싸우는 양 선수를 보며 아마도 그간 겪어온 선거들의 승패 원인을 곱씹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이 과격하기 짝이 없는 경기의 ‘룰’(rule)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종격투기는 길거리 싸움과 진배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스포츠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사람들이 그것을 경기로 인정하는 것은 룰과 그 룰을 집행하는 심판 때문일 것입니다. 간혹 반칙을 하는 선수가 있고 판정에 대해 시비가 일어나긴 합니다. 그래도 경기가 지속되는 것은 선수가 룰을 인정하고 심판이 룰을 공정하게 집행할 것으로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정치라는 것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룰을 만들고 그 룰을 인정할 수 있도록 집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룰이 무너지고 룰을 집행하는 심판에 대한 불신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습니다.
물론 룰은 도도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고 절대다수의 의식 변화를 반영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치가 자연 과학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물리 법칙 같은 ‘기본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바, 인류가 숱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축적한 ‘경험칙’은 함부로 버릴 일이 아닙니다.
금 전 의원께서 말씀하신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화 문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기본 원칙의 문제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 대체적으로 비슷한 성과를 낸다면 당연히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선 우리 사회가 흔들림 없는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기존의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화할 수 있는 역량과 조건이 되느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적자를 다른 방식으로 보전받을 수 있는 고용의 주체, 즉 기업이나 기관이 무제한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럴 때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경험칙일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으로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해나가되 고용보장이 어려울 경우 국가가 사회안전망을 두텁게 해 생계를 보장하고 재교육 기회를 주어 이들의 재기를 돕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국공 사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관철해나가되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국가의 할 일’은 사라지고, 대통령이 다녀가고 약속한 곳에만, 그것도 어떤 경우라도 적자를 무제한적으로 보전받을 수 있는 곳에만 ‘국가의 시혜’가 남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가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기본 원칙, 불가피할 경우 생계와 재기 보장이라는 경험칙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실천해나가는 것이 ‘룰을 만들고’ ‘룰을 지켜나가는’ 국가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나 금 전 의원이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복받은 세대입니다. 우리의 실력과 노력에 별반 상관없이 좋은 일자리와 그만저만한 집을 가질 수 있는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어찌 보면 다른 세대, 특히 후배 자녀 세대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보다 실력도 좋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들의 미래는 캄캄해 보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세대가 이 미안함을 해소하기 위해선, 후배 자녀 세대가 그래도 이 땅에서 살아갈 만하다 여길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룰’을 만들고 이 룰을 제대로 집행할 ‘심판’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금 전 의원님, 요즘 부모들 사이에서는 “내 자녀는 아이를 얼마나 둘까?”라는 질문이 “내 자녀는 과연 결혼할까?”라는 걱정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어렵고 자녀를 기르기 어렵고 집 장만하기 어려우니 젊은이들이 결혼하기 어렵고 결혼한다 해도 아이를 둘지 말지 고민하는 시대입니다. 물론 역대 정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막대한 예산을 써온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합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까요? 아니 풀 수는 있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 기성세대가 자신의 이익과 관습에 사로잡혀 후배 자녀 세대의 고통과 바람에 대해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얘기들을 금 전 의원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이 코너에서는 결이 다른 두 정치인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용태 전 미래통합당 의원이 대화 서신의 형태로 다양한 정치사회 현안에 대한 생각의 차, 생각의 깊이를 나눕니다. 매주 목요일치에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