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지금 당연한 것이 그때는 당연하지 않았다 / 조이스 박

등록 2020-07-23 17:50수정 2020-07-24 02:40

조이스 박 ㅣ 영어교육가·에세이스트

현재 우리에게 숲이란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힐링의 장소,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휴식을 취하는 그런 공간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에 자연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불을 찾아서>라는 1981년 장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가장 첫 장면을 보면, 자연이 그리고 숲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드러난다. 영화 첫 장면은 온통 거대한 어둠인 자연, 그 숲속 공터 어딘가에 실낱같이 타오르는 작은 불로 시작한다. 그 불로 카메라가 줌인 해 들어가면, 한줌의 인간이 그 불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불가만 안전하기 때문이다. 불가를 떠나 한명의 개인이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인간의 생명은 지독하게 위험해질 수 있다. 맹수와 같은 발톱과 이빨도 없고, 그렇다고 덩치도 없고, 초식 동물처럼 빠르지도 않은 인간 한명은 자연 속에서 연약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인간은 어둠에 대한 무서움, 숲에 대한 공포, 유럽의 경우 숲속에서 가장 무서운 맹수인 늑대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 새겨져 있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그렇게나 많은 유럽의 동화와 옛날이야기에 늑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20세기에 접어들며 서유럽 숲속의 늑대를 모두 잡아 죽여 멸종시킬 정도로 늑대를 두려워했지만, 지금까지도 숱한 옛날이야기 속에 늑대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시뻘건 눈으로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무서운 존재로 살아 있다. 인간의 두려움의 대상으로 사악한 존재로 낙인찍혀 동유럽 깊은 산속에서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늑대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서히 서유럽으로 돌아와서 2000년대 후반 독일의 숲에 늑대가 마침내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늑대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얼마나 늑대가 무서웠으면 저리 모두 잡아 멸종시켰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물론 한국에서 멸종된 한국 호랑이 생각도 했다. 인간이 무서워서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섬기던 한국의 산도 인간이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주말마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고 등산을 다니며 둘레길과 올레길과 10대 명산 완주를 즐기는 현대인은 자신들의 정신적 안식과 휴양의 장소인 산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언제나 당연했을까? 아니,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한때엔 당연하지 않았다.

19세기 말까지 어린이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작은 어른’이라 불리며 어른들 못지않은 노동을 했다. 영국 탄광 지역에서는 어른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갱도를 어린이들이 기어들어가 석탄을 캤고, 방직공장에서는 기계를 돌리는 어른들 발밑을 기어 다니며 무수히 떨어지는 털 부스러기를 줍고 또 줍다가 폐가 망가져 각혈을 하는 병자가 되기도 했다. 좁은 굴뚝에는 어른이 들어가기 힘들어서 몸집이 작은 어린이들이 들어가 굴뚝을 청소했었다. 백몇십년 전, 어린이가 인간의 미래라고 어린이를 보호하며 양육해야 한다는 선각자들이 세상을 바꾸어서 이제 비로소 어린이가 안전하게 돌봄을 받고 교육을 받을 권리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지금 당연한 일이 그때에도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이제 우리는 고개를 돌려 타임라인의 다른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미래에 후손들이 이 시대를 바라보며 그때에는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했을까?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에는 이런 질문도 있을 수도 있다. 2020년에는 어떻게 한 사람의 인권이 침해당했다는 고발이 나오면, 그 사람의 성별에 해당하는 사람들 전체를 그 직종에는 채용하지 말자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이런 질문. 그 사람의 성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절반이라고 해도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당연함의 판도는 시대가 바뀌며 달라진다. 우리에게 현재 당연한 인권이 과거에는 당연하지 않았다. 역사 속에 인간이 살고 있음을 안다면, 이따금 멈추어 서서 현재 이 시대 사람들이 다른 성별의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겼던 것에 대해 미래의 사람들이 무어라 할지 한번 잘 생각해볼 일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