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에서 윌리엄 월리스 역을 맡은 멜 깁슨의 마지막 대사는 “프리덤”이다. 영국 왕의 압제에 맞서 싸우다 최후를 맞는 13세기 스코틀랜드 독립투사의 절규라기에는 맥락이 튄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투사 가운데 “자유”라고 외치며 숨을 거둔 이는 몇이나 될까. 설령 역사 속의 월리스가 실제로 “자유”를 목놓아 외쳤다 해도, 그건 ‘프리덤’(불간섭)이 아니라 ‘리버티’(해방)이지 않았을까.
우리 헌법엔 ‘자유’라는 표현이 21번 등장한다. 이 중 두번은 ‘자유민주적’으로 표현돼 있다. 맞다, 단 두번. 더불어민주당은 2018년 2월1일 개헌안 당론을 발표했는데, 헌법 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민주적 기본질서’로 고치겠다고 했다가 4시간 만에 번복한다.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바꾸려는 주사파 정권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고 공격한 데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자유와 민주의 결속력은 대단하다. 예전에는 이 ‘신성가족’에 의문을 내비친 죄로 고문도 당하고 감옥에도 갔다.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압살하는 역설은 의심받지 않았다. 지금은 적어도 고문당하고 감옥 가는 일은 없다. 꼭 그만큼 자유의 지평이 넓어졌다. 그러나 애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불편한 관계였다는 비밀은 여전히 장막에 가려 있다.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이 둘의 불편한 관계를 고백 투로 정리한 바 있다. “나는 머리로는 민주주의 제도를 좋아하지만, 본능적으로는 귀족주의자다. 다시 말해 나는 군중을 업신여기며 두려워한다. 나는 자유, 권리 준수를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민주주의는 좋아하지 않는다.”(<완전한 작품>)
윤석열 검찰총장이 신임 검사들에게 한 연설은 아리송하다.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는 평등을 무시하고 자유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평등, 자유, 민주, 독재, 전체주의가 맥락 없이 튄다. 그러니 질문도 튈 수밖에. 그래서 윤 총장은 월리스인가, 토크빌인가.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