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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보살핌 노동’ 을 사회 몫으로

등록 2006-01-17 18:19

이영자 가톨릭대 교수·사회학
이영자 가톨릭대 교수·사회학
세상읽기
제로섬 게임의 경쟁원리를 생존전략의 유일한 무기로 학습시키는 사회에서 ‘보살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게 들리기 쉽다. 보살핌의 원리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공표하는 시장경제 체제의 경쟁력에 반하는 것으로 치부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상생’과 ‘윈윈 게임’을 외쳐대는 목소리들은 우리 사회가 바로 그 반대편에 있음을 역설해주듯이, ‘보살핌’을 강조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가 보살핌의 원리를 배척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서구에서 복지국가는 소득분배와 사회복지를 통해 무한경쟁의 사회가 자기파괴로 치닫지 않도록 일정 부분 완충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완충역할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 전략이 확산되면서 양극화와 빈곤화가 위험수위로 치닫는 상황이 전지구적 현상으로 대두하고 있다. 오늘의 무한경쟁체제는 다수의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구조로 작동하는 것이며, 그 탈락의 위협과 공포로 인해 잠재적 탈락자들을 서로서로 적대적인 경쟁관계로 몰입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회에서 보살핌, 돌봄의 원리는 점점 더 살아남을 자리를 잃게 된다.

지금까지 보살핌(돌봄) 노동은 가사, 육아, 간병 등과 같이 주로 가족을 위한 재생산 노동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여성의 무급 노동이나 저임 노동이나 자원봉사 활동으로 제공되었던 덕분에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력이 확보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더는 보살핌 노동을 여성들의 몫으로만 맡겨둘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맞벌이 소득이 불가피해지고 남성의 생계부양 능력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여성은 현실적으로 무급의 보살핌 노동자로만 남을 수가 없다. 특히 저소득층 여성의 생계부양 역할이 보살핌 노동으로 인해 이중 삼중의 제약을 받는 현실은 결국 그 가족 전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보살핌 노동에 대한 경제·사회적 보상과 지원 체계가 부재한 현실은 여성 가장의 실직이나 고용 불안정과 맞물려 빈곤의 여성화를 초래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육아휴직을 이용하는 절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단적으로 말해주듯이,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보살핌 노동 분담을 기대하기는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남성에게 보살핌 노동은 육아를 위한 부모 휴가 제도가 마련된 이후에도 성역할 고정관념 때문에, 또는 소득, 승진, 경력 등의 불이익 때문에 기피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출산율 저하와도 연계된다. 고령화 사회가 도래하고 신자유주의체제가 사회적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약자들을 양산하는 것에 비해 복지국가의 역할이 턱없이 미약한 현실에서, 보살핌 노동의 몫이 대책없이 여성에게만 맡겨진다는 것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보살핌 노동을 여성의 사적 노동이 아닌 사회적 몫으로 책임지는 일은 오늘의 역사적 상황이 요구하는 시급한 과제다. 여성주의적 입장에서는 그동안 보살핌의 노동이 오로지 여성 일방의 희생에 의존하도록 방치해온 것, 노동시장에서 보살핌 노동이 여성 노동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어온 것, 그로 인해 여성들이 이중 삼중의 희생을 치러온 것 등의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보살핌 노동을 남녀 공동분담의 사회적 보살핌으로 확대하고 재가치화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는 적대적 경쟁관계와 시장의 교환가치에만 의존해온 기존의 가치체계를 보살핌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보살핌을 노동의 중심가치와 상호 공생의 공익적 가치로 재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지원하는 19조원이란 예산은 출산증가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의 도구적 가치를 넘어서 인간에 대한 보살핌을 국가의 몫으로 떠안는 ‘돌봄의 사회’ 실현을 위한 종잣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영자/가톨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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