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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라스트 오브 어스 2’ 비디오 게임의 윤리학 / 손아람

등록 2020-09-09 15:09수정 2020-09-10 14:11

손아람 ㅣ 작가

폭력은 나쁜가? 당연히 그렇다. 폭력을 다룬 이야기도 나쁜가? ‘나쁜’ 것을 담아낸 이야기도 ‘좋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만이 훌륭한 예술의 조건을 갖췄다고 믿었다. 역겨운 사실조차 솜씨 좋은 재현을 거치면 긍정적인 감정을 촉발시키게 되는데, 감정은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감각의 반응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적으로 배열된 가짜 사건들, ‘플롯’이 현실의 경험보다 더 효과적으로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발상은 현대의 서사 이론까지 계승되어왔다.

감정의 촉매로서 이야기의 절대적 지위는 재현 기술의 발전으로 끝없이 도전받는 중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을 더 생동감 있게 재현해내는 연극이 서사시보다 감정 고양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영화의 재현 위력까지 상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크린을 향해 달려오는 열차의 모습에 공포심을 느낀 관객들이 극장 바깥으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다는 무성영화 <열차의 도착>,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사실적으로 재현된 전투 장면에 압도당한 재향 군인들이 심리상담소까지 찾게 만든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의 등장은 고전 이론의 기본 전제를 뒤흔들었다. 일정 수준에 도달한 모방적 재현은 때때로 잘 짜인 이야기보다 더 즉각적인 감정 고양 효과를 발휘한다. 비디오 게임의 시대에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이 아예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텔링’이 더 이상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2’를 둘러싼 전세계적인 논쟁은 이야기의 기능을 근본부터 되살피게 만든다. 탁월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갖췄음이 틀림없지만 이 게임을 직접 체험한 플레이어의 상당수는 불만을 토로한다. 대체로 그들은 작가가 정한 길을 따라 폭력의 허망한 순환을 목격하기보다 가장 잔혹한 수준까지 복수를 실행하길 희망한다. 게임 플레이어의 윤리의식만을 탓할 수는 없다. 게임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살인과 폭력의 사실적인 재현이 이야기의 정서적 작동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 2’의 체험이 남기는 감각은 폭력의 순환을 짚어내는 이야기의 완숙한 깊이와 어우러지지 못한다. 플레이어가 게임 속 폭력에 가담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말초적인 흥분이 게임 플레이에 절대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게임의 시스템과 이야기는 모순적인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한 게이머가 “(이 게임이 느끼게 하는) 증오의 감정은 작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트위터에 적자,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의 제작자 겸 작가인 닐 드러크먼은 “당신이 이 허구의 인물들을 사랑하는 건 알겠지만 그들은 실제 인물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게이머는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감정을 이야기 바깥으로 투사하고 있고, 작가는 거꾸로 게이머가 ‘느껴야 할’ 감정을 이야기의 틀 안에 가두려 애쓰고 있는 셈이다. 전통적인 서사극에서 관객은 이야기 자체를 수긍하거나 거부할 수 있지만, 인물에 강력하게 이입한 감정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저항하는 법은 좀처럼 없다. 이것은 오히려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성공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실패한 원인은 이야기의 구조적인 결함에 있지 않다. 이야기가 게임 속에 구현된 폭력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데 있다.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서는 기타를 들었던 게임 캐릭터의 손에 게임 내내 소총과 샷건을 쥐여주지 않고도 ‘라스트 오브 어스 2’는 게임으로 성립할 수 있었을까? 이 게임을 지배하는 감각은 기타를 치며 부르는 상실의 노래와 소총을 명중시켜 박살 낸 머리통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폭력을 유희적으로 경유하지 않고 폭력을 들여다보는 방식의 이야기가 게임에서도 가능할까? 플레이어들도 그런 게임을 원하고 있을까? 역대 ‘올해의 게임상’을 휩쓴 게임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살인 혹은 살해의 체험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중 대부분은 살해 자체가 게임 체험의 주된 부분을 이룬다.) 어떤 서사 예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소재의 편향성은 무엇을 뜻할까? 체험이 더 사실적이고 정교해질수록 게임은 낡은 질문과 더 빈번하게 마주할 것이다. 나쁜 체험을 담아낸 이야기도 좋은 게임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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