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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지각변동은 너로부터 / 서한나

등록 2020-09-13 16:32수정 2020-09-14 02:38

서한나|페미니스트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 공동대표

칠판에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글쓰기”를 한줄로 적었는데 오른쪽으로 갈수록 올라갔어요. 나는 책상 모서리를 가운데 두고 어색하게 섰어요. “앞으로 함께 글을 쓸 서한나입니다.” 언니들은 휴대전화를 만지거나 목소리 섞은 하품을 했어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옥상이 간절했고 방금 시작했는데 쉬고 싶었어요. 같이 수업하러 온 친구를 돌아보았는데 그 애 표정도 나랑 비슷했어요.

그래도 준비한 건 하고 가야죠. 몸풀기로 “오늘 강의실에 오기 전까지 있었던 일”을 주제로 던졌어요. 마침 활동가가 사 온 공책은 빳빳해서 언니들 마음에 들었고, 환호에 마음이 놓였어요. 한 언니가 노트를 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나는 힐끔 보고 생각했어요. 우와, 잘 그리신다. 수업은… 모르겠다.

쓸 시간 15분 드릴게요, 하고 음악을 재생하려는데 언니들이 말했어요. 뭘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할 말 없는데. 사각사각 소리가 시작되자 마지막까지 장난치던 언니도 골똘해졌어요. 제한 시간이 지났지만 쓰기 시작한 언니들은 멈추지 않았어요.

나는 자신감이 붙어서 이제 낭독하고 감상을 나누자고 했어요. 영주(가명) 언니는 “나도 해요? 이상한데…” 하면서 뒷목을 주물렀죠. 이런 걸 왜 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언니가 한장 반을 썼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딸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았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도 딸이 웃는 것을 보면 신기하게 나도 웃음이 난다. 딸이 있어서 힘이 나고 힘을 내서 살 수 있게 됐다. 딸이 나에게 와줘서 고맙고 또 고맙다.”

언니는 “빨리 다음 사람 해” 그러면서 눈물을 닦았죠. 옆에선 “아 언니 때문에 울었잖아” 하면서 민망해했고요. 어느 날에 언니들은 집에서 써 온 글이 있다며 읽어주기도 했어요. 언니들 이야기를 듣고 내 글을 들려주며 우리는 서로 알게 됐어요. 기분이 안 좋은 날에 딸기 음료를 마시는 것과 어릴 때 보육원에 살던 기억, 높은 사람이 오는 날에는 맞지 않을 수 있어서 그분들이 가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 좋아하던 카페에 구인공고가 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언니들은 다른 사람의 감상을 열심히 들었어요. 좋은 점 더 없냐 묻기도 하고요. 쉬는 시간에 언니들은 우르르 나가곤 했는데, 하루는 영주 언니가 가만히 있다가 물었어요. “작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공휴일에 쉬고 다음 수업에서 만나면 언니들은 우리 안 보고 싶었냐고 물었어요. 언니들을 자주 생각했어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아~ 왜 울어~ 달래주던 언니, 생각에 잠기던 언니, 그림을 잘 그리던 언니, 어느 날부터 안 보이던 언니, 손이 아프다고 휴대전화 메모장에 꾹꾹 눌러 적던 언니. 쓰고 읽는 시간에는 어떤 경계도 할 필요가 없었어요. 올봄까지의 일이지요.

코로나 때문에 자활센터 출근이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재택근무를 병행하게 되면서 취업 불안이 커졌고, ‘장애인 활동 지원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언니는 교육이 멈춰서 난처하대요.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할 수 있는 자활센터로의 출근을 기다린다고요. 별도의 지원이 있는지 ‘성매매’ ‘코로나’ ‘탈업’을 검색해보았는데 “성매매한 뒤 코로나 걸리면 동선 공개되나요?” 하는 글이 보였어요.

우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많네요. 언니, 어떤 사람이 작가가 될까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나를 소름 돋게 하고 읽은 뒤에도 종종 떠올리게 만들어요. 제대로 살아야지 마음먹게 해요. 이건 영주 언니가 쓴 문장이에요. “나를 자세히 보는 사람은 매일 거울을 보는 나뿐이라는 걸. 너의 편을 들어줄 사람도 너뿐이라는 걸.” 언니, 쓰고 있지요?

(칼럼 제목은 노래 ‘다섯번째 계절’의 가사 일부, 서지음 작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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