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ㅣ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던 이훈구. 그를 사랑하는 동료는 ‘비가 오는 농성장에서 비가 고이지 않도록 비닐을 머리에 이고 기둥이 돼주었던 동지’라며 그리워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 노동운동가의 삶을 쓴다. 그로 인해 세상이 살만했다는 위로를 얻기 위해 기록한다. 모르는 어떤 곳에서 또 다른 이훈구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기에 안도감을 느끼며 쓴다. (이 글은 ‘결국 사람을 위하여’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생애 구술사의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장례식에 다녀온 뒤 그를 쓰기로 마음먹었으나 정작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노동운동가, 생애 마지막까지 노동자 건강권 운동을 했던 사람, 수원촛불, 반올림 농성장 한구석에서 말없이 촛불을 들고 있던 사람, 누구보다 강했지만 자기주장을 위해 큰 목소리 내는 것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 생애사를 읽고 뒤늦게 그를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비추느라 자신의 빛을 모두 소모하고 떠난 사람, 노동운동가 이훈구.
이훈구는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기억이 ‘가족들에 의존해 구성했을 정도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남아 있지 않다’고 표현한다. 대신 막걸리 먹게 해준다고 들어간 동아리 활동에서, 안 봤던, 몰랐던 ‘민중’ ‘민중의 삶’이라는 세상을 만난 이후는 한 해도 빠짐없이 자기 삶을 구체적으로 기억한다. 그는 대학 졸업을 하지 않고 바로 용접공이 된다. 이론을 실천하기 위해 현장에 투신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노조 만드는 활동을 시작했다. 잠시 활동을 정리하고 스낵코너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긴 시간은 아니었다. 돌아온 그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해산에 따른 백서작업에 참여하고 노동운동 조직에서도 활동한다. 1999년 무렵 근골격계 질환으로 산재 판정을 받고 요양 중이던 이상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계기로 노동안전보건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상관 투쟁’으로 불리게 된 이 사건에서 ‘옳은 주장만으로 세상이 바뀌거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하는 노동자가 가장 잘 아는 현장’의 노동자 건강권 운동에 발을 디디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를 결성하고 준비위원장을 맡게 된다. 2020년 1월 퇴임식 전까지 상임활동가로 일했다.
그와 동료들은 “일하다가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을 권리를 쟁취하자”를 넘어 “더 안전하게, 더 편하게, 더 쉽게” 일하는 3더 운동을 내세웠다.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노동 환경에서 산업재해는 피할 수 없는 재난이라는 점, 전문가들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현장 노동자들에게서 답을 찾는 건강권 운동의 길을 가자는 점 등이 그와 동료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의 노력은 여러 현장을 바꿨고,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2013년 연구소의 1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빌어먹을 놈, 거지 발싸개 같은 놈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남들에게 하찮게 보이지만 정작 거지에게는 추위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존재인 ‘거지 발싸개’가 된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과 무관하게 누군가에게 간절하고 중요한 문제를 함께하는 사람인 것이었다. 떠나기 전 유서에도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요란한 부고장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났다. 하지만 그를 알던 이들에게 어떤 삶이 위대한 것인지 고요하게 말해주고 갔다. 곳곳에 이훈구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평안에 이르기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잘 살다 가셨습니다. 훈구형, 안녕.
“함께해서 좋았던 벗들에게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거지 발싸개처럼 소중하고 유의미하게 지내려고 애써왔지만, 늘 부족했음을 느낍니다. 빌어먹을 수 있도록 빌어준 벗들과의 인연과 고락 그리고 관심과 응원을 잊지 않겠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매 순간 다른 세상을 꿈꾸며 가슴에 품고 작아 보이는 일이라도 소중히 하려고 애써왔습니다. (…) 제 뜻대로 제멋대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느라고 가족들에게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가슴 깊이 반성합니다. 또 아쉬움이 있다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꼼꼼히 챙기지 못한 것인데, 벗들은 지금부터라도 심신을 단련하는 것에도 시간과 역량을 일상적으로 꾸준히 챙기길 바랍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늘 편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