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박 | 영어교육가·에세이스트
뇌에는 부정문이 없다. 그래서 ‘이웃집 아내를 탐하지 말라’와 같은 부정 명령문을 듣고 이를 마음에 새기면 새길수록, 사람의 뇌는 ‘하지 말라’에 꽂히는 게 아니라, ‘이웃집 아내’에 꽂힌다. 이웃집 아내를 탐하지 않으려면, 이웃집 아내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부정 명령문은 새기면 새길수록 신경은 온통 ‘이웃집 아내’에 쏠려 더 집착하게 만드는 그런 기제가 있다. 인간은 그래서 하지 말자는 결심 앞에서 수시로 무너진다.
문제는, 하지 말아야겠는데 눈이 자꾸 하지 말아야 할 대상에게로 돌아가서 수치심이 들 때, 혹은 그런 욕구를 들킬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바로 혐오로 이를 해결하려 들 수 있다는 점이다. 수치와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 중 어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극렬하게 ‘하지 마라’라는 부정 명령문을 외치게 되고, 그 행동을 하는 이들을 심하게 정죄하게 될 수도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방어기제 중 하나인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을 수치심과 공포심에서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기제인데, 자신 속에 있어서 싫은 부분을 외부의 타인에게서 보면 그게 더욱더 싫어지는 기제이고, 이게 감정과 섞여 외부로 표출이 되면 강렬한 혐오로 터져 나오거나 타인에 대한 심한 정죄로 표출될 수 있다.
테드 해거드라는 미국 극보수주의 근본주의 교회인 새생명교회의 창립자이자 목회자는, 동성애는 죄라고 미국 전역에서 설교를 하던 사람이다. 하지만 2006년 그의 위선을 참지 못한 그의 동성애 파트너가 사실은 테드 해거드가 동성애자라고 폭로를 하면서 세상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회개를 하고 교회로 다시 돌아온 테드 해거드의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한편으로는 내 내면의 전쟁 때문에 그렇게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 같습니다.”(I think I was partially so vehement because of my own war) 그의 고백은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괴로워하다 보니, 외적으로는 그 이슈에 대한 강한 혐오를 표출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혐오는 자기혐오라고 제임스 볼드윈이라는 미국 작가는 말한 바 있다. 혐오를 자기 처벌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자신과 불화하는 이가 세상과 불화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이는 그 내면의 피폐함으로 인해 이미 벌을 받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문제는, 이 혐오가 인터넷을 만나 더욱 강화되고 퍼지고 감염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정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보다는 훑어보기(scanning)식 읽기에 더 적합한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무리를 짓기 쉽고,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혐오의 특징인 피폐함 역시 같이 널리 퍼진다. 한 인간의 황량하고 피폐했던 내면이 집단을 만나 증폭되면서 결국 사회의 한 구역이 온통 같이 황량하고 피폐해지는 모습을 연출한다. 망치를 든 사람의 눈에는 못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혐오의 망치를 든 사람들에게는 달려가 망치질할 타인의 ‘그릇됨’만 보인다. 다른 이의 맥락과 사정은 모두 시야 밖으로 밀려나고, 오로지 못질할 못만 보이는가 싶다. 그렇게 악순환은 돌아간다.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까 고민한다. 일단, 무리에 속해 자기 되먹임을 하는 일을 경계해야 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혐오가 뒤집힌 거울이라는 것은, 그 혐오가 비추어야 할 나의 수치와 나의 공포를 타인에게 전도해서 비추기 때문이다. 강렬하게 거부감을 느끼는 대상이 생기면, 우리는 혐오를 소리 내어 외치고 주먹을 흔들기 전에 멈추어서 생각해야 한다. 나와 한목소리로 같은 혐오를 느끼는 작은 그룹 안에서 내가 안도감을 구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혐오라는 거울을 뒤집어 놓고 내가 눈 돌리고 외면하는 나를 봐야 한다. 뒤집힌 거울을 바로 놓고 자신과 마주하며 내 마음을 챙기기, 그게 내가 사는 공동체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첫걸음이지 않을까.